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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핏빛 땀의 야생마
    카테고리 없음 2021. 2. 16.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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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 十五 章. 핏빛 땀의 야생마


    곽정은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말을 들어 대금국을 증오해 왔고 또 이번에 자칫했더라면 완안열 수하의 황하사귀의 손에 죽을 뻔까지 했다. 이때 징기스칸의 말을 듣고 생각했다.
    (여섯 분 사부의 도움만 있다면 만사는 성공이다. 무예를 모르는 용사들을 제아무리 많이 끌고 간다 하더라도 오히려 귀찮기만 하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사부님들과 동행을 하오니 무사를 데리고 갈 필요는 없겠습니다.]

    징기스칸은 기뻤다.

    [지금 우린 말도 살찌우지 못했고, 병사도 제대로 훈런시키지 못했으니 아직은 대금국의 적수가 못되네. 절대로 탄로나지 않도록 해야 되네.]

    곽정이 머리를 끄덕여 대답하자 징기스칸은 즉석에서 황금 30근을 노자로 쓰라고 주고 또 왕한에게서 뺏아 온 금그릇이며 보물을 강남 육괴의 몫으로 하사했다. 사흘째 되던 날 아침 곽정은 어머니에게 눈물로 하직을 고하고 여섯 사부를 따라 장아생의 묘지를 찾아 절한 뒤 남쪽을 향해 출발했다.

    10여 리를 걸었을까 머리 위론 두 마리의 흰수리가 맴돌고 있고 타뢰와 화쟁이 말머리를 가지런히 하여 곽정을 전송하고 있었다. 타뢰는 그에게 아주 귀한 담비 가죽으로 만든 겉옷을 주었다. 그것도 역시 왕한의 창고에서 뺏아 온 것이다. 화쟁은 아버지가 자기를 곽정에게 시집보내기로 한 것을 알고 있는 처지라 두 볼을 붉힌 채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었다. 타뢰는 빙그레 웃는다.

    [누이야, 곽정하고 얘기 좀 나누렴. 내 안 들을 톄니.]

    말을 마치고 말을 달려 저만큼 물러선다.
    화쟁은 고개를 떨군 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인다.

    [빨리 돌아오세요.]

    곽정이 고개를 끄덕여 대답한다.

    [또 무슨 일이 있어요?]

    화쟁이 고개를 흔들자 곽정이 그를 가볍게 끌어안았다가 잠시 후 타뢰 옆으로 달려가 그와도 포옹을 한다.

    [그만 돌아가. 길을 재촉해야겠어.]

    말고삐를 나꿔채 벌써 멀리 가 버린 사부들의 뒤를 쫓는다. 화쟁은 그의 무뚝뚝한 태도가 불만스럽다. 어쩌면 옛날이나 마찬가지람. 속이 상해 채찍을 들어 애꿎은 청총마(靑 馬)를 후려갈겼다.

    강남 육괴와 곽정은 낮에는 긷고 밤에는 쉬면서 동남향을 향해 계속 갔다. 며칠 지나지 않아 사막과 초원을 벗어났다. 이날 흑수하(黑水河)에 도착할 무렵이다. 장자구(張子口)가 예서 멀지 않다. 곽정은 사막을 떠나 본 일이 없다. 산천 경개 그 모두가 새롭고 신기하기만 하다. 두 발로 홍마의 배를 차니 바람소리만 쉭쉭 귓가를 스치고 가옥과 수목이 뒤로 달린다. 홍마도 신바람이 나는지 단숨에 흑수하에 당도, 길가 여인숙 앞에 말을 맸다.
    곽정이 보니 홍마도 얼마를 달렸는지 땀방울이 솟았다. 마음속으로 안됐다는 생각이 들어 손수건을 꺼내 닦아 주다가 깜짝 놀랐다. 손수건에 불긋불긋 핏방울이 묻었다. 다시 홍마의 오른쪽 어깨 부분을 닦아 주니 역시 마찬가지다. 곽정은 놀라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다. 공연스레 흥을 내다가 이 준마를 해칠뻔하지 않았는가? 후회 막급하여 홍마의 머리를 어루만져 주었다. 그런데도 말은 여전히 기운이 샘솟는 듯 피곤한 기색도 없이 생기가 넘쳐 흐른다.

    곽정은 고개를 길게 빼고 세째 사부 한보구가 오는가를 살핀다. 오시면 애마를 치료해 달래야지. 그런데 이때 길 저쪽에서 길고 은은한 낙타 방울 소리를 울리며 눈처럼 흰 네 마리의 낙타가 달려오고 있는게 보였다. 낙타에는 흰 옷을 입은 남자들이 타고 있었다.
    곽정은 이렇게까지 예쁜 낙타들을 본일이 없다. 자기도 모르게 물끄러미 바라다보는데 그 네 명은 모두 22, 3세의 나이, 미목이 청수하고, 누구하나 손색 없는 미남자들이다. 넷이 낙타등에서 뛰어내려 식당으로 들어가는데 허리와 다리의 움직임으로 보아 무공을 익힌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곽정이 보니 그들은 흰 외투를 입고 있었지만 속에는 여우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곽정이 뚫어지게 바라다보자 그 중 한 명은 겸언쩍은지 볼을 붉히며 고개를 떨군다. 다른 하나가 눈을 부라리고 곽정을 쏘아본다.

    [야, 바보처럼 무얼 보는 게야?]

    곽정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넷은 무언가 소곤거리며 시시덕거린다. 곽정은 그들이 자기를 비웃는 줄 알고 얼굴을 붉히며 다른 식당을 찾아 옮기려는데 한보구가 황마를 타고 달려왔다.
    곽정은 달러가 흥마가 피를 흘린 얘기를 했다. 한보구도 이상하다는 표정이다.

    [그래, 그런 일이 있어?]

    그는 홍마에게 다가가 어깨를 어루만지다가 햇빛에 비추어 본 뒤 하하거리며 웃는다.

    [이건 피가 아니라 땀이야.]
    [땀이라뇨? 그래, 붉은 땀도 있나요?]
    [곽정아, 넌 천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귀한 말을 얻었다.]

    곽정은 자기 말이 병든 것이 아님을 알자 안심이 되었다.

    [세째 사부, 어깨서 피 같은 땀을 흘리나오?]
    [나도 내 선사(先師)께 들은 얘긴데 서역 대완(西域大宛)에 일종의 천마(天馬)가 있다더라. 어깨에서 땀을 흘릴 때 불그레한 것이 꼭 피 같다나. 갈기가 마치 날개 같아 하루에 천 리를 간다는데 그야 어디 전설이지, 본 사람이 있나?]

    이렇게 말을 주고받는 사이 가진악 등이 모두 도착했다. 주총은 시서(詩書)에 통달한 사람, 고개를 살레살레 흔든다.

    [그야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에도 분명히 씌어 있는걸. 당시 박망후(博望侯) 장건(張騫)이 서역에 사신으로 갔다가 대완 입구의 이사성(貳師城)에서 피땀을 흘리는 귀한 말을 보고 돌아와 한무제(漢武帝)에게 알렸지. 한무제는 말을 갖고 싶어 사신에게 황금 천 근과 또 정말 말만한 크기로 금을 부어 말을 만들어 대완국에 보내고 그 말 한필 달라고 했것다. 그 대완국 왕은 말하기를, 이사성의 말은 대완국 국보니 한인(漢人)에케 즐 수 없다고 했단 말야. 한나라 사신은 화가 나서 그만 성질을 부리고 말았네. 금으로 만든 말을 부숴 가지고 가겠다고 했것다. 대완국 왕은 그 무례함을 보고 사신을 죽이고 황금 천 근과 금으로 만든 말을 차지해 버린 일이 있다네.]

    곽정은 그제야 <아>소리를 냈다. 주총은 찻잔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래서요?]

    그 흰옷을 입은 미남자들도 정신 없이 주총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주총은 차를 한 모금 마신다.

    [세째 아우, 자넨 말 다루기로 유명한 사람이니 그 말이 어디서 왔는지 알겠나?]

    한보구에게 묻는다.

    [제가 선사에게 듣기로는 집에서 기르는 말과 들말이 교배해서 생긴 것으로 아는데요.]
    [옳아, 책에 씌어 있는 바에 의하면 이사성 부근에 산이 하나 있고 그 산에 들말이 살고 있는데 어찌나 빠른지 사람들이 감히 쫓을 생각을 못 한대. 그래서 대완국 사람들이 꾀를 생각해 냈지. 봄이 오면 밤에 예쁜 암말을 산에 놔둔다나. 그럼 그 들말이 대들고 거기서 태어난 말이 바로 이런 말이래요. 곽정아, 네 말이 바로 대완국에서 만 리나 달려 네게 온 건지도 몰라.]

    한소영도 듣다가 참견을 한다.

    [그래 한무제가 그냥 그만 두고 말았나요?]
    [어디가? 즉시 이광리(李廣利)를 이사 장군(貳師將軍)에 임명해 그 군사를 이끌고 대완국을 치게 했지. 그런데 대완국으로 가려면 사막을 지나야 하는데 군량이 있나 물이 있나, 도중에 죽는 사람이 많아 대완국에 도착했을 때는 군대가 반도 남지 않았어. 한 번 싸워 패하자 돈황(敦煌)으로 물러나 황제에게 원병을 청했는데 천자가 대노하고 사람을 시켜 옥문관(玉門關)을 지키게 하고 이렇게 하교를 내렀다네. <패해 들어오는 자는 모두 참수하리라>. 이광리도 진퇴양난이라 할 수 없이 돈황에 머무르고 말았다네.]

    여기까지 말하는데 낙타의 방울 소리가 울리며 또 네 사람이 흰 낙타를 타고 도착했다. 넷이 식당으로 들어서는데 모두 흰 옷을 입은 미남자들이다. 그들 넷은 먼저 와 있던 넷과 합석하여 먹을 것을 시킨다.
    주총은 계속 얘기를 잇는다.

    [한무제가 생각해 보니 이건 말도 구하지 믓하고 수만 군사만 잃고 말았단 말야. 외국에서 알면 이 무슨 망신인가? 우리 한나라 천자를 우습게 블것 아니냐? 그래서 다시 이십만의 군내를 보내는데 군량이며 식수 등 완전무결한 준비를 했것다. 그래도 혹시 병력이 부족하지 않을까 해서 전국에 명령하여 죄 지은 관리며 전국의 데릴사위, 상인 등을 모두 종군케 했으니 원 세상이 떠들썩 할 수 밖에. 또 말 길 잘 들이기로 유명한 두 사람의 마사(馬師)에게 큰 벼슬까지 주었다네. 하나는 구마교위(驅馬校尉), 또 하나는 집마교위(執馬校尉), 어쨌든 대완을 치고 말을 얻겠다는 거야. 누이도 그때 태어났더라먼 고생 좀 했을 거고, 세째는 벼슬아치가 될 뻔했네. 하하하.]
    [데릴사위도 무슨 죄가 되나요?]

    한소영이 묻는다.

    [가난한 놈 아니구야 누가 데릴사위로 들어가나. 어쨌든 이광리는 대군을 이끌고 대완성을 사십여 일이나 공격했지. 수많은 용장을 죽이기도 하구 말일세. 대완의 귀인들이 놀라 국왕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와서 투항했네. 물론 말도 바치고 말일세. 이광리가 개선을 하자 천자는 너무나 기뻐서 그를 해서후(海西侯)로 봉하고 참전한 사람마다 모두 승진을 시컸겨든. 그 말 한 필 때문에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죽고 재산을 탕진했는지 아나? 한무제는 잔치를 베풀고 즉석에서 천마지가(天馬之歌)란 노래까지 읊었다네. 하늘 위의 용이래야 이 말의 친구가 될 수 있느니 어쩌니 하면서 말야.]

    흰 옷을 입은 여덟 명은 얘기를 들으면서 그 홍마를 훔쳐 보며 몹시 탐이 나는 눈치다.

    [천마가 뛰이난 것은 바로 그 이사성의 들말을 닯아서 그런 건데, 한무제가 그렇게 어렵게 구해 온 말이지만 교배시길 들말을 구할 수 있어야지, 몇 대를 걸쳐 내려오는 동안 이제 뭐 신통할 것도 없고 무슨 피 같은 땀이 흐르는 것도 없이 되어 버렸다네.]

    주총이 얘기를 끝내자 모두들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흰 옷을 입은 여덟 명의 소년들이 멀찌기 떨어져 앉은 채 뭔가 소곤거리그 있었다. 비록 멀찌기 떨어져 있기는 했지만 가진악의 귀가 밝아 그들이 주고받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대들어 말을 뺏아 버려, 올라타기만 하면 쫓아오진 못할 테지?]

    한 놈이 얘기하자 다른 놈이 받는다.

    [아니 여기 사림들이 많은데 어떻게 뺐는냔 말야.]
    [대들면 모조리 죽여 없애지 뭘.]

    이건 또 다른 놈이 하는 말이다. 가진악이 듣고 깜작 놀랐다.

    [아니 저 여덟 명이 전부 여잔데 어째 저리 독할 수 있을까.]

    즉시 아무것도 모르는 체 얼글을 돌려 식당 밖만 내다보고 있으니까 그들은 더욱 열을 낸다.

    [우리가 저 말을 뺏아 산주(山主)에게 바치면 그놈을 타고 서울에 가실 게고 그럼 더욱 위신이 설 거야. 장백산(長白山)의 삼선노괴(參仙老怪)나 서장밀종(西藏密宗)의 대수인(大手印) 영지상인(靈智上人)도 더 뽐내지는 못할 테니까.]

    가진악은 영지상인이 서장의 고승이란 말은 들은 적이 있지만, 삼선노괴란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다. 그러자 또 다른 녀석이 입을 연다.

    [요며칠 노상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모두가 천수인도(千手人屠) 팽련호(彭連虎)의 수하들이라고 들었는데 그들도 틀림없이 서울로 모일 게야. 만약 이 말이 그놈들 눈에 띈다면 어디 우리 차례나 오나?]

    이 말을 들은 가진악은 마음즉으로 또 한 번 놀랐다. 팽련호라면 하북(河北), 산서(山西) 일대를 누비는 포악한 무리의 우두머리다. 사람 죽이기를 개 잡듯 하기 때문에 별명이 친수인도다.

    [이렇게 굉장한 우두머리들이 무엇 때문에 서울로 모여들까? 그리고 저 여자들의 정체는 도대체 무어냐 말이다.]

    곰곰이 생각에 잠겼는데 그들은 마을을 벗어나 길을 막고 기다리다가 곽정의 말을 뺐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들은 계속해서 너절한 얘기들을 주고받는다. 뭐 산주가 너를 제일 좋아힌다느니 지금도 산주는 널 생각하고 있을 거라는 등 시시한 얘기들을 가지고 저희들끼리 계속 노닥거린다. 가진악은 그들의 얘기가 역겨워 이마를 찌푸린다. 그러나 다시 화제를 곽정의 말에 들린다.

    [우리가 저 귀한 말을 뺏아 산주에게 바치면 무슨 상을 우리에게 줄까?]
    [얘, 널 며칠 밤 데티고 잘 톄지 뭘 그래.]

    먼저 얘기를 꺼낸 여자가 교태를 부려 허리를 꼬자 저희끼리 시시덕거리며 웃는다.

    [얘들아, 너무 시끄럽게 떠들지들 마라. 그러다 행장이라도 드러나면 어쩌려고들 그래.]

    그 중 하나가 주의를 시킨다. 그러자 다른 또 하나가 말문을 연다.

    [저기 저 여자 칼 차고 있는 것을 보니 무예를 하는 모양인데 잘 생겼구나. 십 년만 더 젊다면 산주가 보그 홀딱 반했겠다.]

    가진악은 그들이 한소영을 두고 하는 말임을 알고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들 얘기를 들어 보면 그 산주란 작자가 돼먹지 않은 인물임에 틀림없다.

    [산주의 환심만을 사기 위해 쓸데없이 예쁜 여자를 구해다 바치지는 말어.]

    그 증 하나가 시시덕거리며 웃을 뿐 아무 말이 없다. 다른 하나가 또 얘기를 꺼낸다.

    [우리가 이번 중원(中原)에 온 것은 이름을 날려 천하의 영웅들 앞에 백타산(白駝山)의 위세를 떨치자고 하는 건데 다들 조심해야지 공연히 까불다 황하사귀꼴이 되면 그 무슨 망신이냐. 웃음거리가 되면 큰 일이다.]

    가진악은 백타산이 어느 파에 속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황하사귀>란 말을 듣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산주가 그리던데 황하사귀는 귀문용왕의 수제자들인데 농서중주(瓏西中州)에서는 꽤 명성이 있다나봐. 그런데 이번에 여남은 살 먹은 어린 아이에게 당했다니 그 참 이상하지.]
    [누가 그러는데, 그 아이 가 구음백골조를 쓴데나 봐. 황하사귀가 긁혀서 몸에 구멍이 뚫렸다던데.]
    [너 조심해라. 잘못하다간 그 아이에게 여기릍 긁힐라.]

    또 한바탕 시시덕거리며 웃어 댄다. 가진악은 들으면서 화도 나고 우습기도 했다.
    (강호의 소문이 빠르기도 하구나! 그러나 곽정이 구음백골조를 할 수 있다니 그런 엉터리가 있나? 적어도 십 년 이상 해야 성공할지 말지 하는데 여남은 살에 그런 재주를 익힐 수 있나? 천만의 말이지.)
    어쨌든 곽정이 처음 나서서 황하 사귀를 해치운 것만은 흐뭇한 일이다. 6형제가 10년 동안 들인 공이 헛되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다.
    그 여자들은 국수와 과자 등을 먹고 서둘러 낙타를 타고 먼저 떠났다. 가진악은 그들이 멀리 가 버리자 입을 열었다.

    [들째 아우, 자네 보기엔 여덟 여자의 무공이 어때 보이던가?]

    주총이 어리벙벙해서 묻는다.

    [여자라뇨?]
    [왜 그러나?]
    [아, 그들이 남장 여자였군요. 전연 몰랐는걸요. 그들의 몸놀림이 이상해서 어떻게 보면 무예를 아는 것 갈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전연 모르는 것 같기도 하군요.]
    [백타산 얘기 들어 본 일 있나?]

    주총등이 생각해 본 뒤에 없다는 대답이다. 가진악이 방금 그들이 주고받은 얘기를 들려주자 주총등은 모두 가소롭다는 표정이다.
    그러나 가진악은 달리 생각하는 눈치다.

    [말 뺏는다는 일이야 작은 일이지만 이름있는 우두머리들이 서울에 모인다는 건 좀 생각해 볼 문재야, 무슨 곡절이 있을 테니까. 그들이 대들면 모르는 체할 수야 없는 일 아니겠나?]

    그러자 전금발이 나선다.

    [우린 가흥의 무예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지체할 수 없습니다.]

    잠시 모두들 생각에 잠긴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다.

    [곽정을 먼저 보내지!]

    남희인이 제안을 하자 한소영이 묻는다.

    [네째 오빤 곽정을 먼저 가흥으로 보내고 우린 서울 소식을 알아본 뒤 쫓아가자 이거죠?]

    남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곽정도 이제 혼자 다니며 세상 물정도 알고 경험도 해야지.]

    주총도 찬성이다. 곽정은 잠시나마 사부님들과 작별을 한다고 생각하니 몹시 섭섭했다. 그런 태도를 보고 가진악이 책망을 한다.

    [야 이 녀석아, 다 커 가지고 어린애처럼 섭섭해 하다니.]

    한소영이 그래도 위로를 한다.

    [먼저 가서 기다리면 한달도 못돼 우리가 쫓아갈 텐데 뭘. 무예를 겨루게 되면 우리 여섯이 다 모이진 못해도 한두 명은 먼저 가 뒤를 보아 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곽정이 고개를 끄덕여 대답한다. 그러자 가진악이 주의를 시킨다.

    [그 여자들이 네 말을 뺏겠다고 하니 넌 소로로 해서 빠져 나가거라. 내 말이 빨라서 쫓아오진 못할 게다. 증요한 일이 앞에 있으니 각별히 조심을 해야 한다.]
    [만일 그 여자들이 너를 해코자 한다면 강남 칠괴가 용서치 않겠다.]

    한보구가 하는 말이다. 소미타 장아생이 죽은지 어언 10여 년, 하지만 육괴는 늘 강남 칠괴라고 말했다.
    육괴는 우선 다른 일도 있거니와 무엇보다 곽정을 강호에 뛰어들게 함으로써 세상 물정이나 파악하게 하자는 뜻이 있었다. 경험만은 육괴로서도 가르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각기 몇 마디 서로 당부를 한다. 남희인이 가장 뒤에 입을 열었다.

    [이길 수 없거든 달아날 줄도 알아야 해.]

    지난번 곽정이 황하사귀와 벌인 혼전은 사실 위험한 일이었다. 상대가 사귀였기 망정이지 그들보다 조금만 더 높은 고수를 만났다면 그냥 죽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 지극히 간단한 것 같으면서도 의미 심장한 말을 들려준 것이다.
    전금발도 한 마디 거든다.

    [무학(武學)이란 끝이 없어 산 뒤엔 또 산이요, 사람 위에 사람있으니 천하 무적일 수 없다. 네째 사부의 말쏨 잊지 말거라.]

    곽정이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고 여섯 분 사부께 일일이 절을 한 뒤 말에 올라 남쪽을 향해 떠났다.
    2리 정도나 달렸을까? 눈앞에 길림길이 나다났다. 곽정은 가진악이 일러 준 대로 소로를 택했다. 이 소로는 거리가 더 멀고 또 꼬불꼬불한데다 평소 행인까지 적어 길이 엉망이다. 바닥이 울퉁불퉁하고 여기저기 돌이 흩어져 있어 매우 걷기 힘들다. 그러나 홍마는 아랑곳하지않고 계속 잘 달린다. 다시 7, 8리 더 갔을까? 지세가 더욱 험해지고 길가엔 깎아지른 기암 절벽이 하늘을 끼른다. 곽정은 자기도 모르게 머리끝이 쭈삣하여 칼자루를 잡은 채 앞만 보고 가면서 생각한다.
    (세째 사부께서 내 이 꼴을 보신다면 또 겁장이라고 꾸짖으실 텐데.)
    이때 길은 점점 험헤지고 좁아진다. 산모퉁이를 돝아서자 흰옷을 입은 세 명의 남장 여인들이 낙타를 탄 채 길을 막고 있었다. 이를 본 곽정은 가슴이 두근거려 말고삐를 잡았다.

    [실례합니다. 길 좀 비켜 주세요.]

    세 여자가 웃음을 터뜨리고 그 중 하나가 먼저 얘기를 꺼낸다.

    [꼬마야, 뭘 무서워해. 와요. 잡아먹지 않을 테니.]

    곽정이 얼굴을 붉히고 말로 할까, 아니면 손을 쓸까,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자 다른 여자가 말문을 열었다.

    [네 말이 근사한데 어디 구경 좀 해보자.]

    말투가 꼭 어린아이 다루듯 한다. 그 말을 듣고 화를 안 낼 장사가 없는 것이다. 오른쪽은 깎아지른 절벽의 산이요, 왼쪽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낭떠러지, 손을 쓰자니 겁도 나고 해서 고삐를 나꿔채면서 두 발뒤꿈치로 말배를 찼다. 홍마는 화살처럼 잎을 향해 난다. 곽정은 칼을 비껴 들고 소리를 지른다.

    [말이 간다. 길을 비켜라!]

    말은 빨리 달려 벌써 세 사람의 면전에 당도했다. 흰 옷을 입은 한 여자가 낙타에서 뛰어내리면서 몸을 달려 홍마의 깃털을 잡으려 했다. 홍마는 긴 투레질을 하면서 몸을 허공으로 날려 세 마리의 낙타를 타고 넘어 여자들의 뒤로 가 땅에 떨어진다. 세 여자만 놀라는 것이 아니라 곽정까지도 뜻밖의 일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 중 한 여자의 비명 같은 호통 소리에 곽정이 고개를 돌리니 번쩍번쩍 두 개의 암기(暗器)가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것이 보인다. 곽정은 처음 당해 보는 일이라 혹시 그 암기에 독이나 묻지 앓았을까 두려워, 쓰고 있던 가죽 모자를 벗어 들고 받았다. 그쪽의 여자들도 이를 보고 혀를 차는 눈치가 역력했다.
    곽정이 모자 안을 들여다보니 은으로 정교하게 만든 베 짤 때 쓰는 북이 들어 있었다. 북 끝이 뽀족하고 날카로와 맞기만 하면 그대로 즉게 되어 있는 것이다. 곽정은 피가 치밀어 올랐다.
    (저것들이 나와 아무 원한이 없거든 내 말을 담내어 죽이려고까지 덤비다니.)
    은으로 만든 북마다 금으로 낙타를 아로새겨 박아 놓았다. 곽정이 그것을 주머니 속에 넣는데 머리 위에 비둘기 울음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쳐드니 두 마리의 흰 비둘기가 북쪽 하늘에서 남쪽 하늘로 날아가고 있었다.
    곽정은 혹시 또 다른 적이 앞에 숨어 길을 막고 있지 않을까 두려워하면서 말을 몰았다. 한 시간도 못 되어 벌써 1백여 리를 달려온 셈이다. 잠시 쉬다가 다시 말을 달려 날이 어둡기 전에 장가구(張家口)에 도착했다. 흰 옷의 여자들이 오려면 사흘은 걸려야 할 거리다.

    장가구는 남북 교통의 요로요, 가죽과 털의 집산지라 인구가 많고 교역이 왕성한 곳이다. 곽정이 말을 끌고 두리번 두리번 구경이 한창인데 보는 물건마다 신기하기만 했다. 마침 식당 앞을 지나다가 갑자기 배고픈 생각이 들어 말을 매어 놓고 안으로 들어가 쇠고기 한 접시와 두 근의 밀가루 떡을 시켜 한 입 한 입 먹기 시작했다. 곽정은 몸도 건강하고 또 막 클 때라 어찌나 입맛이 나는지 젓가락을 쓸 새도 없이 몽고 사람 습관 그대로 고기와 떡을 연방 입에 쑤셔 넣으며 맛있게 먹고 있었다. 이때 밖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말이 걱정이 돼 달려 나와 보니 말은 얌전히 풀을 뜯고 있고 웬 남루한 옷을 입은 소년을 식당 점원들이 혼내고 있었다.
    그 소년의 나이 15,6세, 머리엔 찢어진 가죽 모자를 비스듬히 눌러 쓰고 얼굴과 손에는 때가 덕지덕지 묻어 있다. 봄이라지만 북국은 아직도 추운데 맨발인 걸 보면 굉장히 가난한 모양이다. 그는 커다란 만두 하나를 손에 든 채 시시덕거리고 있는데 희고 맑은 이가 가지런히 들여다보인다. 얼굴 생김과는 아주 딴판인 고운 이다.

    [그 만두 이리 주고 얼른 꺼지지 믓해!]

    점원 하나가 소리를 지른다.

    [그래 갈 테야]

    막 몸을 돌려 가러는데 다른 점원 하나가 또 소리를 지른다.

    [만두 내놔라.]

    소년은 만두를 내준다. 그러나 하얀 만두 위에는 손때가 묻어있었다. 다시 팔래야 팔 수도 없이 되어 버린 것이다. 점원이 화를 내면서 주먹을 휘두르자 소년이 몸을 숙여 피한다. 곽정은 그가 불쌍해서 중간에 끼어들었다.

    [내가 대신 갚아 줄 테니 때리지 말아라.]

    땅에 떨어진 만두를 주워 소년에게 건네 준다. 소년은 만두를 받아 들고 가게 앞에 있는 강아지를 향해 던진다.

    [불쌍한 너나 먹어라.]

    점원 하나가 혀를 찬다.

    [아니 고기가 가득 든 만두를, 아깝게 강아지에게 주다니.]

    곽정도 깜짝 놀랐다. 배가 고파 그런 줄 알고 사정을 보아 준건데 강아지에게 먹이다니. 곽정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계속 밥을 먹는데 소년이 따라 들어와 물끄러미 자기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곽정은 겸연쩍은 생각이 들어 소년을 불렀다.

    [여기 와서 좀 먹을까?]
    [그렇지 않아도 혼자 심심했는데 잘 됐군.]

    그의 말투는 남방 사투리다. 곽정의 어머니는 절강(浙江)의 임안(臨安) 사람이다. 어러서부터 어머니의 말을 들어 알고 있었다. 반가운 생각이 앞섰다.
    소년이 식탁으로 대들자 곽정은 점원을 불러 수저를 가져오라고 했다. 점원은 믓마땅한지 한참 뒤에야 겨우 가져왔다. 소년이 화를 벌컥 낸다.

    [날 가난하다고 깔보는 모앙이로구나. 너희 집에서 제일 고급이라는 요리를 가져와도 내 입맛 맞추기 어러울 텐데. 건방지게.]

    점원은 비웃는다.

    [그래? 시키기만 해라. 아무리 고급 요리라도 다 만들어다 바칠 테니. 그러나 돈이 있어야 사먹지?]

    소년은 곽정을 바라다본다.

    [내가 얼마를 먹든지 돈 낼 수 있겠니?]
    [암 물론이지.]

    소년은 점원을 다시 바라다본다.

    [쇠고기 한 근, 양간 반 근이다.]
    [술도 마실래?]

    곽정이 소년을 보며 묻는다.

    [서두룰 것 없어. 천천히 먹지, 우선 호박씨부터 먹지. 야 이 점원 녀석아, 말린 과일 네 가지, 싱싱한 과일 네 가지, 꿀 바른 떡 좀 가져와라.]

    점원이 어리벙벙해서 묻는다.

    [마른 과일은 무어며 꿀 바른 떡이라뇨?]

    그러자 소년이 한참 주워 섬긴다. 점원은 듣도 보도 못한 요리 이름이 술술 소년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을 들으며 어안이 벙벙해진다.

    [여긴 신선한 새우나 생선은 없을 톄니 안주는 보릉의 것으로 여덟 가지만 해 오너라.]
    [어떤 것으로 여덟 가지를 할깝쇼?]

    이제 점원은 허리까지 굽실굽실 야단이다.

    [볶은 오리 발바닥, 닭의 혀로 만든 국, 사슴 간천엽....]

    점원은 정신이 나간 모양이다.

    [아이구 그 값만 해도 굉장한 돈이겠군오.]
    [이놈아, 이분이 돈을 내신다는데 네가 걱정할 게 뭐야.]

    점원이 곽정을 쳐다보니 진귀한 담비 가죽의 외투를 입고 있는 것이 보통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아 대답을 하고 주방으로 물러갔다.

    [도련님들, 술은 어떤 걸로 드실까요? 저희 집에 십 년 묵은 미주가 있는데 그걸 드시겠습니까?]

    소년이 고개를 끄덕인다.
    좀 지나자 호박씨며 꿀 바른 떡 등이 나오기 시작했다. 곽정도 처음 먹어 보는 진귀한 것들이다. 소년은 남방의 풍물이며 인정 등, 자기가 아는 얘기를 곽정에게 들려주었다. 곽정은 그의 견식과 학식이 해박함을 보고 흠모하는 마음이 생겼다. 곽정은 둘째 사부만 학식이 풍부한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소년은 둘째 사부보다 더 아는 것이 많은 듯했다.
    (가난뱅이 소년인 줄 알았더니 유식한 군자로구나.)

    반시간이나 지났을까? 주문한 음식들이 가득히 식탁위에 쌓인다. 그런데 소년은 술도 약하고 입도 짧은지 얼마 먹지를 못한다. 곽정이 몽고에서 왔다는 말을 듣고 몽고에 대한 얘기를 이것 저것 묻는다. 곽정은 사부들의 분부가 있었기 때문에 자기 신분이 탄로날 말은 꺼내지 않고 사냥 얘기, 말 타는 얘기, 양 치는 얘기 등만을 재미있개 들려주었다. 소년은 재미있으면 박수를 치거나 웃으며 듣고 있었다. 천진 난만한 소년의 모습이 귀엽기까지 했다.

    곽정은 사막에서 자란 몸이다. 비록 타뢰나 화쟁의 두 친구가 있기는 했지만 징기스칸은 아들을 사링하여 늘 곁에 데리고 다녔기 때문에 타뢰와 함께 놀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화쟁은 또 공주라 함부로 아무곳이나 데리고 다니며 놀 수도 없는 처지거니와 귀염둥이로 자란 응석과 어리광 때문에 함께 잘 놀다가도 늘 다투기 일쑤였다.
    그런데 이 소년과는 어쩐 일인지 아무 격의 없이 사귈 수 있었다. 곽정은 성격이 순진하고 솔직한 편이라 어렸을 때 저지른 바보짓 같은 것들을 숨김 없이 들려주다가 그만 자기도 모르게 소년의 손을 잡고 말았다.
    소년의 손은 마뜻하고 부드러운 것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소년은 고개를 숙여 웃고 있었다. 고개를 죽인 소년의 뒷목이 부드럽고 흰 것이 이상했지만 곽정 또한 그런 데는 둔한 편이라 별달리 생각하지 않았다.
    소년이 가볍게 손을 땐다.

    [우리가 얘기만 하다 보니 밥도 식고 반찬도 식었네요!]
    [정말이군, 다시 데워 오라고 하지.]
    [아니 한 번 익힌 음식을 다시 데우면 맛이 없어요.]

    그는 식은 음식을 치우게 하고 다시 몇 가지를 더 시킨다. 식당의 주인이나 점원들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어쨌든 장사라 시키는 대로 할 뿐이다. 곽정 또한 이미 자기가 내겠다고 약속을 한 이상 액수에 신경을 쓸 위인도 아니다.
    다시 음식이 상 위에 올랐지만 소년은 몇 젓갈 집어 볼 뿐 배가 부르다고 더는 먹지 않는다. 점원이 곽정을 보면시 너만 어리석게 당하는구나 하는 눈치다. 계산을 해 보니 3백 냥하고도 또 몇 푼이란다. 곽정이 품에서 금을 꺼내 5백 냥만 바꾸어 오라고해서 계산을 치르고도 점원들에게 10냥씩을 주었다. 주인과 점원들이 굽실거리며 그들 둘을 문 밖으로 전송했다.
    식당에서 나오니 밖엔 눈발이 회끗회끗 날리고 있었다. 소년이 먼저 입을 연다.

    [실례가 많았군요. 자 그럼 다음에 또 만납시다.]

    곽정은 마음이 착해 자기의 담비 외투를 밧어 그에게 입혀 준다.

    [우리는 한 번 만났을 뿐인데 친형제 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이 옷을 입고 가요.]

    곽정에게는 아직도 네 개의 황금이 남아 있었다. 그 중 세 개를 꺼내 외투 주머니에 넣어 준다. 소년은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가버린다.
    곽정은 뒷모습을 바라다보면서 그래도 원가 아쉬운 눈치다. 소년이 뒤를 돌아다보니 곽정이 홍마를 잡은 채 자기를 바라다보고 서 있었다. 손을 흔들어 보이자 곽정이 또 달려간다.

    [뭐 부족한 게 없나요?]

    소년은 빙그레 미소를 보낸다.

    [아직 형씨의 존함을 묻지 않았군오.]
    [정말 그렇군요. 깜박 잊었는걸. 내 성은 곽이요 이름은 정이라 해요. 아우님은?]
    [제 성은 황(黃)이요 이름은 외자로 용(蓉)이라 해요.]
    [그래 아우님은 이제 어디르 가시는지? 만일 남방으로 가신다면 우리 동행을 하면 어떨까 해서....]

    황용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든다.

    [전 남방으로 가지 않아요.]

    이렇게 대답을 해 놓고 또 엉뚱한 수작이다.

    [형씨, 또 배가 고프군요.]
    [그럼 다시 한턱 냅시다.]

    이번엔 황용이 앞장을 서서 장자구에선 제일 크다는 장경루(長慶樓)로 찾아들었다. 아까처럼 요리를 시키는게 아니라 간단한 간식 서너 가지와 한 주전자의 용정차(龍井茶)를 시켜 놓고 또 화제의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황용은 곽정이 두 마리의 흰 수리를 기른다는 말을 듣고 호기심이 바짝 댕기는 눈치다.

    [내 지금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망설였는데 그럼 내일 몽고로 가야겠군요. 가서 흰 수리나 두어 마리 잡아 오게.]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냐.]
    [그럼 어떻게 구했어요?]

    곽정은 묵묵 부답이다가 한참 지나 다시 입을 연다.

    [아우님 집은 어디며 왜 돌아가지 않지?]

    황용이 갑자기 눈언저리를 붉힌다.

    [아버지가 날 좋아하지 않아요.]
    [왜?]
    [아버진 나다니며 놀지 말라고. 하시지만 난 놀고만 싶었어요. 그러다가 꾸중을 듣고 밤에 몰래 집을 나와 버렸죠.]
    [그래도 지금 아버지는 자식 생각만 하실걸. 그래 어머니는?]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어요.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없었는걸요.]
    [실컷 놀다간 그래도 집으로 가야 해.]

    황용은 눈물을 흘린다.

    [아버지가 받아 주시지 않는걸요.]
    [그럴 리가 있나?]
    [그럼 왜 나를 찾지도 않죠?]
    [지금 찾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지]

    황용은 눈물을 흘리다 해맑게 웃는다.

    [그럼 실컷 놀고나선 집으로 돌아가죠. 그러나 우선 흰 수리부터 잡고요.]

    둘이 얘기에 팔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아 있는데 계단 쪽에서 발자국 소리가 울리며 두명의 준수하게 생긴 동자가 비단옷을 입은 소년 공자를 모시고 올라왔다. 공자의 풍채가 늠름하고 꼭 옥을 다듬어 놓은 듯 잘생겼는데 나이는 18,9세나 되었을 성싶다. 그가 곽정과 황웅의 초라한 꼴을 보고는 이마를 찌푸리고 그들과 가장 먼 좌석을 가리키자 동자는 찬합에서 준비해 온 그릇과 젓가락 등을 내놓는다.
    곽정이 시선만 한 번 주었을 뿐 다시 더 거들떠보지도 않고 황용과 얘기를 주고받는데 아래층에서 홍마의 투레질 소리가 길게 나며 사람들이 소란을 부리는 소리가 들렸다. 곽정이 창 앞으로 달려가 내려다보니 7,8명의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자기의 애마를 둘러싼채 잡으려 하고 말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잡히지 않으려고 날뛰는 것이 보였다. 곽정은 놀랍기도 하거니와 화도 났다. 보아하니 낮에 노상에서 길을 막고 있던 그 남장 여인들과 똑같은 복장이다. 이렇게 빨리 쫓아을 수 있을까, 몹시 궁금했다.

    [이놈들! 밝은 대낮에 남의 말을 훔치려들어?]

    소리를 지르고 계단으로 달려 내러가 보니 여덟 명의 흰 옷을 입은 그자들이 땅에 쓰러진 채 눈을 부릅뜨고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다.



    第 十六 章. 무예로 신랑감을 구하다


    곽정은 갑자기 부드럽고 따뜻한 손길이 자기 손에 와 닿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러 보니 황용이다. 언제 내러왔는지 알 수 없다.

    [거들떠볼 필요도 없어요. 우리 다시 올라가요.]
    [저들이 내가 타고 온 말을 훔치려 한 모양인데 어떻게 다들 저렇게 쓰러셨는지 알 수 없는 일인걸.]

    두 사람이 다시 올라오는데 비단옷을 입은 그 소년 공자가 내려오는 것이 보인다. 8명의 남장 여인과 곽정, 황용을 바라다보며 이상하다는 눈치다. 항용은 곽정의 손을 잡은 채 위로 올라와 곽정의 찻잔에 차를 따라 준다.

    [형님, 말이 굉장히 좋군오.]

    곽정이 막 대답을 하러는데 아래층에서 낙타의 방울 소리가 울린다. 둘이 창 앞으로 가 내려다보니 그 8명이 벌써 낙타에 올라탄 채 밖으로 나가는 것이 보인다. 그 중 하나가 곽정을 발견하고 살기등등하게 두 눈을 부라리고 오른손을 뻗어 은으로 만든 베 짤 때 쓰는 북을 두 개 날린다.
    곽정이 모자를 벗어 받으려고 하는데 정원에 서 있던 그 공자가 왼손으로 두어 번 뭔가를 퉁긴다. 금빚이 번쩍번쩍 암기(陪器)가 날아 은으로 만든 북에 가 맞고 땅에 떨어졌다. 엎에 모시고 있던 동자가 네 개의 암기를 주워 공자에게 바쳤다. 공자는 그것을 받아 품속에 넣고 위층으로 올라와 곽정 앞에 서서 인사를 한다.

    [형씨의 존함은?]

    곽정도 답례를 하고 대답한다.

    [제 성은 곽이요 이름은 정이라 하는데 무슨 분부라도 있으신지?]
    [곽형은 동해(東海) 도화도(桃花島)에서 오시지 않았는지? 흑시 무슨 일이라도....]
    [아니오, 전 북방에서 왔습니다. 도화도는 가 보지도 못댔습니다. 공자의 도움이 여간 고맙지 않습니다.]
    [신분을 밝히지 않으시려고 하니 그냥 헤어집시다. 다음 기회가 있을 테죠.]

    말을 끝내고 절을 한다. 곽정도 급히 답례를 하는데 강한 바람이 얼굴을 향해 날아 온다. 그 공자는 긴 소매를 흔들며 곽정의 눈을 노린다. 곽정은 뜻밖의 급습을 당했다. 피차 절을 하다가 이럴 수가 있을까? 어찌나 센 공격인지 미처 피할 길도 없었다. 할 수 없이 고개를 숙여 두 다리 사이에 끼면서 물구나무를 선 채 허공을 한 바퀴 도는데 팍 소리와 함께 등뒤가 아프다. 곽정은 놀랍기도 하거니와 화도 치밀어 오른다.

    [네 놈이....]

    그 공자는 하하거리며 읏는다.

    [그저 곽형의 무공을 시험해 봤을 뿐이오. 점혈(點穴) 무공은 훌륭하시고 주먹과 발은 정상이시군. 미안합니다.]

    말을 끝내고 다시 절을 한다. 곽정은 또 공격을 해 올까 봐 뒤로 한 발 피했다. 황용도 놀란 듯 몸을 기우뚱 하더니 들고 있던 젓가락을 놓친다. 젓가락이 공자의 발 앞에 떨어졌다. 공자가 정말 절을 하고 허리를 펴는데 황용이 젓가락을 집어들었다. 공자는 황용의 지저분한 꼴을 보고 피하면서 곽정을 향해 미소를 보내고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간다. 황용이 곽정을 항해 속삭인다.

    [이걸 주세요.]

    곽정이 그의 손바닥을 보니 번쩍번쩍 하는 두 개의 금비녀와 은으로 만든 북이다. 공자가 방금 품안에 넣은 암기가 틀림없는데 어떻게 해서 황용이 가지고 있을까? 곽정은 깜짝 놀랐지만 곧 알아차렸다.

    [공자님, 물건을 잊으셨군요.]

    공자가 걸음을 멈추고 쳐다보더니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손을 뻗어 매가 병아리를 채듯 다섯 손가락으르 곽정의 손바닥을 할퀸다.
    곽정은 깜짝 놀랐다. 솜씨를 보니 이건 틀림없이 여섯째 사부가 늘 말씀하시던 <구음백골조>다. 그러면 그가 철시 매초풍과 한패란 밀이냐? 곽정은 그때 절벽 위에서 매초풍에게 팔을 긁힌 일이 있었다.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 공자의 솜씨가 매초풍처럼 날카롭거나 무서운 것은 아니지만 화살에 놀란 새와 같이 고생을 했던 터라 감히 받아 넘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즉시 장심(掌心)을 움직였다. 내력(內力)이 모인 곳에 네 개의 암기가 튀어 올랐다.

    초면인 그 공자의 손은 곽정의 장심에서 반 자쯤 떨어져 있었다. 네 개의 암기가 튀어 오른 것을 보니 곽정의 손바닥은 아래로 처지는 것도 아니오, 그렇다고 위로 뻗는 것도 아닌데 암기만 오히려 뛴 거문고 줄과 같다. 그의 내공이 비범하지 않음을 보고 즉시 암기를 챙겨 들고 곽정을 응시해 보다가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선다. 곽정이 자리로 돌아오니 황용이 아무말 없이 웃으며 자기를 건너다본다.

    [그게 어째 자네 손에 있었지?]
    [그가 인사를 할 때 땅에 떨어뜨렸기에 그냥 주워 버렸지요.]

    황용은 계속 웃고 있었고, 곽정은 솔직한 젼이라 그냥 예삿일로 받아들였다.

    [형님, 그 여자들이 무엇 때문에 형님의 말을 뺏으려구 그래요?]

    황용의 물음에 곽정은 이 희귀힌 말의 내력과 오는 도중 낙타를 타고 있는 이들 여자들과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그런데 그 누가 내 뒤에서 나를 돌봐 주는지 모르겠단 말야. 그렇지 않았다면 또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을 텐데....]

    황용은 가법게 미소만 지을 뿐이다.

    [내 말이 어찌나 빠른지, 말을 뺏으려고 덤벼들던 여자들이 쫓아오려면 아무래도 사흘은 걸릴 텐데, 반나절도 안 되는데 뒤를 쫓아오다니? 원, 영문을 알 수 없단 말야.]
    [내가 보니까 그들 가운데 한 명이 비둘기 한 쌍을 들고 있던데요.]

    이 말을 들은 곽정이 책상을 탁 친다.

    [옳아 옳아, 내 뒤를 쫓아을 수가 없으니까 비둘기릍 날려 앞에 가는 일행들에게 연락을 했군 그래. 그때도 확실히 머리 위로 비둘기가 날았거든.]

    둘은 또 한참 동안 노상에서 겪은 일들을 주고받다가 황용이 다시 홍마로 화제를 돌리고 곽정의 말이 끝나자 몹시 부러운 눈치를 보이다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웃으며 얘기를 꺼낸디.

    [형님, 청이 하나 있는데 들어주시겠어요?]
    [그럼, 들어 주고말고.]
    [저도 형의 그 말을 갖고 싶은데요....]
    [암! 주지 줘!]

    머뭇거리지도 않고 시원시원하게 대답해 버린다. 황용은 입에서 나오는대로 농담삼아 해 본 말이다. 사람 좋은 곽정이 어떻게 거절하나 보려고 한 것인데 뜻밖에 시원스런 대답읕 듣고는 책상에 엎드려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당황한 것은 곽정 편이다.

    [왜 그래? 어디 몸이라도 불편한가?]

    황용이 고개를 쳐든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지만 환하게 웃는다. 두 줄기 눈물이 흐른 자국의 피부가 눈처럼 희고 곱다.

    [자 형님, 우리 이제 갑시다!]

    곽정이 계산을 끝내고 내려와 홍마를 어루만지며 당부한다.

    [내 너를 친구에게 주기로 했으니 말 잘 들어야 해. 못된 성질을 부리면 안 된다. 자 여기 올라타게.]

    홍마는 원래 다른 사람이 다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주인의 당부가 있었으니 기역할 수 없을 뿐이다. 황용이 말에 오르니 곽정이 가볍게 말엉덩이를 때렸다. 홍마는 바람을 일으기며 내달리기 시작했다. 황용과 홍마의 모습이 모퉁이로 사라진 후에야 곽정은 몸을 돌렸다. 날이 이제 머지 않아 저물 것만 같다. 여관을 찾아 정하고 불을 끈 뒤 잠자리에 들었다. 막 잠이 드는데 방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요?]
    [친구일세!]

    목 쉰 소리가 대답을 했다. 곽정이 문을 열고 내다보니 희미한 촛불 밑에 다섯 사람이 우뚝 서 있는 게 아닌가? 네 사람은 칼과 창을 비껴 들고 서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당시 자기와 악전 고투를 했던 황하 사귀(黃河四鬼)요, 다른 하나의 나이는 50여 세, 깡마른 체구에 파란 얼굴이다. 유난히 긴 볼에 이마 위엔 혹이 세 개나 불끈 솟아나 있는 것이 보기 흉했다.
    깡마른 그자가 냉소를 띠면서 거침없이 방으르 들어와 털썩 주저앉으며 비스듬히 곁눈질로 노려본다. 촛불이 이마 위의 혹에 반사되어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관골에도 몇 군데 병기에 맞은 상처가 더욱 그를 험상궂게 만들었다. 단혼도 심청강(斷魂刀 沈靑剛)이 입을 열었다.

    [이분이 우리 사숙(帥叔)일세. 명성이 쟁쟁한 삼두교(三頭蛟) 후통해(候通海)씨야, 빨리 절하고 뵈어라.]

    곽정은 자기가 꼼짝달싹할 수 없이 포위된 것을 알았다. 황하사귀만도 상대하기가 어려운 일인데 게다가 사숙이라는 자까지 끼워 놨으니 당해 낼 도리가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두 주먹을 한데 모아 읍을 하면서 말문을 열었다.

    [무슨 일로 이렇게.... ?]
    [너희 사부들은 어디 계시냐?]

    삼두교 후통해가 퉁명스럽게 받는다.

    [제 사부님들은 여기 계시지 않습니다.]
    [흥 그래. 그럼 내가 널 반나절만 더 살려 주마. 다른 사람들이 이 삼두교를 두고 젖먹이 어린애를 상대했다고 할까 무섭다. 내일 점심때 서쪽 십 리 밖에 있는 흑송(黑松) 숲속에서 기다리마. 네 여섯 분의 사부들과 함께 오거라, 알겠느냐?]

    말을 마치고 곽정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나가 버린다. 추명창 오청열(追命槍 吳靑烈)이 기다리고 있다가 밖에서 문을 채워 버렸다.
    곽정이 촛불을 끄고 다시 자리에 누워서 보니 창 밖으로 사람의 그림자가 오락오락 망을 보고 있었다. 반 시간쯤 지났을까?
    이번에는 지붕 위에서 인기척이 울린다.

    [달아날 생각은 아에 꿈도 꾸지 마, 나으리가 여기 지키고 계시단 말야.]

    곽정은 달아날 수 없음을 알고 억지로 눈을 붙여 보았지만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온밤을 뜬 눈으로 새우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여관의 심부름군이 세수물과 아침상을 들여 놓았다. 전청건(錢靑健)이 쌍도끼를 들고 계속 감시하고 있었다. 곽정은 생각했다. 사부들이 멀리 계시니 구하러 오실 수도 없을 테고 또 달아날 수도 없는 입장이니 대장부답게 싸우다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결심을 하고 나니 오히려 태연해 졌다. 방안에 앉은 채 마옥(馬鈺)이 가르쳐 준 대로 한참 동안 연습을 하니 벌써 점심때가 되었다. 믐을 일으켜 세우며 상문부 전청건(喪門斧 錢靑健)에게 말을 꺼냈다.

    [자, 우리 갑시다!]

    두 사람이 어깨를 가지런히 서쪽을 향해 10여 리를 가니 과연 솔숲이 보였다. 가지가 무성하여 해를 가리니 숲속은 어둠침침하여 10여 보 앞을 내다볼 수가 없었다. 전청건이 곽정을 제쳐 놓고 먼저 숲 안으로 들어간다. 곽정이 허리에 매고 있던 부드러운 채찍을 풀어 손에 귀고 한 발짝 한 발짝 그 뒤를 따랐다. 숲속의 오솔길을 따라 얼마를 갔을까? 여전 적의 인기척이 없다.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헤어질 때 네쩨 사부가 한 말이다.

    [이길 수 없거든 달아나거라!]

    (감시하는 사람도 없는데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막 옆으로 숨어들려 하는데 머리 위에서 화가 난 사람의 욕소리가 들렸다.

    [아 이 잡종아, 바보야, 이 왕바단(王八蛋)!]

    곽정이 서너 발짝 펄쩍 뛰어 피하여 채찍을 들어 방어 태세를 취하고 고개를 드니 이 어인 일인가? 놀랍기도하고 우습기도 했다. 황하 사귀가 모두 손이 뒤로 묶인 채 나무 워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지 않은가? 넷이 곽정을 발견하고 계속 욕을 퍼붓는다. 곽정은 웃음이 나왔다.

    [아니 거기서 그네를 다나? 재미있지? 또 만나세. 나는 이만 실례하네!]

    심청강 등은 생각했다. 사숙이란 사람은 적의 뒤를 쫓아간 뒤 아직까지 오지 않고 있으니 무슨 일이 있는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요, 이제 곽정이 가버리면 구해 즐 사람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며칠 매달려 있다간 지쳐 죽지 않으면 굶어 죽을 일이다. 그렇다고 곽정을 보고 살려 달라고 애걸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계속 욕만 퍼부었다.
    탈백편 마청웅(奪魄鞭 馬靑雄)은 곽정의 뒷모습이 숲 끝으로 사라져 가자 생사의 고비가 달린 지금 그까짓 체면이 다 뭐냐고 큰소리로 불렀다.

    [곽영웅(郭英雄)! 우리가 졌소. 제발 우리를 좀 내려 주오!]

    곽정은 생각했다.
    (내가 저들과 철천지 원수를 진 일이 없거든 그냥 죽는 걸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웃으면시 몸을 돌이켜 세우고 나무 위로 뛰어올랐다. 그들을 묶은 끈을 살펴보니 쇠가죽을 찢어 물에 불렸다가 쓴 것이다. 제아무리 사귀의 공력이 대단하다 하더라도 벗어날 수 없게 되어었다. 금칼을 빼어 가죽을 끊고 그들을 땅에 내려 놓은 뒤 다시 손을 뻗어 그듣의 완혈(腕穴)을 눌러 꼼짝할 수 없게 했다. 네 사람은 갑자기 두 어깨가 시끈 시끈 옴쭉달싹할 수가 없었다. 곽정은 또 한 번 웃으며 입을 연다.

    [열 두 시간 뒤면 혈도(穴道)가 풀릴 게고 통증도 멈출 게요. 그런데 도대체 누가 그렇게 나무에 매달아 놨소?]

    전청건의 성질이 제일 난폭하다. 꽥 하고 소리를 지른다.

    [딴 수작 부리지 마오. 자기가 묶어 놓고 딴전야!]

    곽정은 삼두교 후통해가 어디서 또 대들지 몰라 더 머믓거릴 수 없어 즉시 솔숲에서 빠져 나와 시내로 들어왔다. 좋은 말 한 필을 사 타고 남쪽을 향해 길을 재촉했다.
    (슬그머니 나를 구해 준 은인은 도대체 누굴까? 이 황하 사귀의 공력도 보통이 아닌데 그들을 나무 위에 매달아 놓으면서도 자기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아 내가 한 줄 알고 있게 했다면 그 솜씨는 정말 보통이 아닌 것이다. 도대체 누군지 종잡을 수도 없구나. 그런데 또 그 삼두교 후통해는 어디로 갔기에 그림자도 볼 수가 없었지?)

    하루를 꼬박 날려 중도(中都)인 북경에 도착했다. 여기가 대금국의 서울이다. 당시 천하에서 제일 번화한 곳이다. 송나라의 옛서울인 번량(卞梁)이나 임안(臨安)도 여기에 비할 바 아니다. 곽정은 사막에서 자라난 사람이다. 보는 것마다 휘황 찬란하고 신기한 것들이라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번쩍번꺽 빛이 나는 술집들이며 찻집들이 즐비했지만 감히 들어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제일 허름한 듯한 식당을 찾아가 요기를 하고 발길 닿는 대로 거리를 구경하며 다녔다. 반나절이나 지났을까? 갑자기 전면이 시끌시끌 떠들며 박수치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고 보니 사람들이 둘러선 채 무언가 구경을 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곽정이 사람 틈을 비집고 안을 들여다보니 넓은 공지에 비단 깃발이 꽂혀 있다. 흰 바탕에 빨간 꽃, 비단실로 <비무초친(比武招親. 무예를 겨루어 신랑을 구함)>이라는 네 글자가 금빛으로 수놓여 있고 그 밑에 빨간 옷을 입은 소녀와 건강한 남자가 때마침 주먹을 휘두르며 대결하고 있었다. 곽정이 소녀의 솜씨를 살펴보니 동작마다 법도가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수초를 겨루는 사이 그 소녀가 허를 보이고 말았다. 그 남자는 크게 기뻐하며 쌍교출동(雙蛟出洞)의 솜씨를 발휘, 두 주먹으로 상대의 가슴을 향해 찔렀다. 눈 낌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소녀는 피할래야 피할 도리가 없었다. 얻어맞기만 하면 중상을 입게 되어 있다. 낭자는 그래도 상대가 여자라 사정을 보아 주는지 두 주먹을 피고 손바닥으로 그의 어깨를 내리치려고 했다. 소녀는 몸을 움츠리며 물 속에서 노니는 고기처럼 매끄럽게 빠져 나가 왼쪽 어깨를 비틀며 내리치니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등에 가 맞는다.
    남자는 비틀비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앞으르 고꾸라지고 만다. 비록 두 손을 뻗어 땅바닥에 댄 채 쓰러졌다가 순간적으로 몸을 일으켜 세우기는 했지만 창피해서 얼굴도 못 들고 사람 틈을 비집고 숨어 버렸다. 구경꾼들이 갈채를 보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소녀는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지며 깃발 아대 가 선다. 곽정이 소녀의 모습을 보니 어딘가 낯 익은 엄굴이다. 비록 햇빛에 그을린 피부이기는 하기만 아름다운 자태가 숨겨져 있고 범하기 어려운 기상이 엿보인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자기는 처음 중원에 왔는데 설마 아는 얼굴이겠느냐고 체념을 했다. 시골에서 처음 올라온 처지라 무엇이든지 신기해 보이고 보는 여자마다 다 미인으로 비치는 것이겠지 이렇게 생각했다. 이쨌든 호기심이 발동하여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구경만 했다.
    소녀는 자기 옆에 서 있는 중년 남자와 몇 마디 소곤거린다. 그남자가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둘러서 있는 사람들을 향해 공손히 절을 한다.

    [제 성은 목(穆)이요, 이름은 역(易)이라 하옵니다. 이름을 얻자는 것도 아니요, 또 이(利)를 구하자는 뜻도 아닙니다. 다만 제 딸아이 이제 과년하기로 혼처나 구하고자 이렇게 염치 없이 여러분 앞에 나섰습니다. 부자집 도령을 사위로 맞겠다는 것도 아니올시다. 다만 똑똑하고 무예가 뛰어난 분이면 더 바랄 데 없습니다. 나이는 삼십 세 미만, 아직 미혼인 분으로 제 딸과 겨루어 이기기만 하면 되겠습니다. 저희 부녀가 동서 남북 십삼 개 성을 두루 돌아다니며 찾았습니다만 이름있는 호걸들은 대부분 가정을 가지고 계시더군요. 그래서인지 소년 영웅을 아직 뵈올 길이 없었을 뿐입니다. 북경은 와호장룡(臥虎藏龍) 천하의 영웅들이 다 모이신 곳으로 알고 이렇게 외람되게 찾아들었습니다. 널리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이만 하고 내일 다시 나와 뵙도록 하겠나이다.]

    그가 말을 끝내고 막 <비무초친(比武招親)>이라고 쓴 비단 깃발을 거두려고 하는데 군중 틈 동서 양편에서 어떤 사람들이 동시에 소리를 지른다.

    [잠깐만!]

    두 사람이 일시에 가운데로 들어왔다. 여러 사람들이 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동편에서 나타난 사람은 뚱뚱한 중늙은이인데 얼굴에는 수염이 더부룩하고 그 수염조차 반이상이 하얗게 셌다. 아무리 보아도 50은 넘어 보인다. 서쪽에서 나타난 사람은 더욱 괴짜다. 머리를 빡빡 깎은 중이 아닌가? 그러자 뚱뚱보가 군중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웃긴 왜들 웃어요? 저쪽에선 무예로 신랑을 고른다 하고, 난 아직 총각이니 안 된달 수 있겠소?]

    이 말을 들은 중이 빈정거린다.

    [영감, 당신이 설령 이긴다 하더라도 이 꽂 같은 규수는 과만하오.]
    [뭐라구? 무엇 때문에 재수 없이 중이 나서는가?]
    [이렇게 예쁜 처녀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다면 나도 중 그만두고 환속할라오.]

    사람들은 히리를 잡고 웃어 댄다.
    소녀는 에쁜 얼굴에 노기를 띠고 방금 입었던 외투를 벗고 나서며 상대를 하려고 든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가 그녀를 잡고 만류한다. 그런데 이쪽의 중과 뚱뚱보는 서로 먼저 소녀와 상대를 하겠다고 말다툼이다. 구경꾼들은 더욱 신이 나서 떠들어 댄다.

    [당신들 두 사람이 먼저 겨루어 보고 이긴 사람이 소녀와 상대하면 될 게 아니오.]
    [좋소, 우리 그렇게 합시다. 영간, 어디 한 번 솜씨를 구경합시다.]

    중이 먼저 대답을 한 뒤 쉭 하고 주먹을 내 휘두르자 뚱뚱보도 주먹으로 맞선다.
    곽정이 보니 중이 쓰는 것은 소림나한권(少林羅漢拳)이요, 뚱뚱보가 쓰는 것은 오행권(五行拳)인데 모두가 외문(外門)의 공력이다. 중은 몸을 솟구쳤다 낮췄다 하는 몸놀림이 날렵하고 그 뚱뚱보 역시 주먹질과 발길질에 힘이 솟구치는 것이 나이가 많다고 얕잡아 볼 처지가 아니다. 한참 싸우다가 중은 믐을 부드럽게 꺾고 정면으로 대들어 퍽퍽퍽 뚱뚱보의 허리를 세 번이나 후려쳤다.
    뚱뚱보는 코방귀를 뀌고 아픔을 참으며 피하지도 않고 오른손 주먹을 높이 치켜 들고 묵중한 쇠망치로 내리치듯 중의 대머리를 쳤다. 중은 견디지 못하고 땅바닥에 엉덩방아릍 찧고 주저앉았다가 순간적으로 장삼의 소매 속에서 칼을 뽑아 들고 뚱뚱보의 발을 찍으려 들었다.

    구경꾼들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고 뚱뚱보는 펄쩍 뛰어 칼을 피하면서 허리에 차고있던 쇠채찍을 떼내어 손에 쥐었다. 원래 그들 둘 다 무기를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칼과 쇠채찍이 어울려 불꽂을 튀긴다. 사람들이 주춤주춤 뒤로 피했다.
    소녀의 아버지인 목역이 두 사람 옆으로 다가서서 만류해 보았지만 그들 둘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러자 목역이 두 사람 틈으로 비집고 들어가 중이 들고 있는 칼을 차 버리고 다시 뚱뚱보의 채찍을 잡아챘다. 목역도 화가 났는지 중의 칼을 두 동강으로 분질러 내버리고 채찍마저 꺾어 집어던졌다. 무서운 공력이다. 구경꾼들은 박수 갈채를 보내고 중과 뚱뚱보도 놀라 아무 말 없이 군중 틈으로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이때 곽정이 그 목역을 보니 등이 구부정하고 허리가 굵직한 것이 체격이 우람하고 나이는 40여 세에 불과해 보이지만 귀밑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주름살이 있는 것이 육순은 되어 보인다. 목역이 한숨을 쉬더니 딸을 향해 말을 건다.

    [내일 우리 남쪽으로 떠나자.]

    빨간 옷을 입은 소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구경꾼들이 더 볼 것 없다고 분분히 홑어지는데 이때 갑자기 수레에 달린 방울 소리를 울리며 수십 명의 건강한 하인들이 한 소년 공자를 모시고 이쪽으로 왔다. 곽정이 보니 며칠 전 장자구(張字口)의 술집에서 만났던 바로 그 공자라 얼른 사람들 틈으로 목을 움츠렸다.
    그 공자는 비무초친의 비단 깃발을 보고 다시 그 소녀를 아래 위로 훑어보더니 빙그레 웃는다. 그리고 말에서 내려 사람 틈을 비집고 소녀 앞에 나서며 입을 열었다.

    [무예를 겨루어 신랑을 구한다는 사람이 바로 아가씨입니까?]

    소녀는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돌리고 목역이 나선다.

    [제 성은 목가이옵니다. 공자께서 무슨 분부라도 있으시온지?]
    [비무초친의 규칙이 어떻습니까?]

    목역이 한바탕 설명을 끝내자 공자가 말을 한다.

    [그럼 어디 나와 한번 겨루어 봅시다.]
    [공자께서 무슨 농담의 말씀을....]
    [왜 그러오?]
    [소인 부녀는 미천한 백성이온데 어찌 감히 공자와 맞설 수 있습니까? 이 일이 그냥 보통 장난삼아 내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제 딸아이의 평생 운명이 달린 일이오니 공자께서는 혜량하시옵소서.]

    그 공자는 다시 빨간 옷의 소녀를 전너다본다.

    [그래 며칠이나 해왔소?]
    [십상 성을 두루 돌아다넜으니 벌써 일 년이 넘는가 봅니다.]
    [그럼 한 사람도 이 소녀를 이긴 사람이 없단 말이오? 못믿겠는걸.]
    [무예가 뛰어난 분들은 이미 결혼을 했거나 아니면 소녀와 겨룬다는 것이 어색해서 그랬겠지오.]

    목역은 황종하다는 듯 두 손을 비빌 뿐이다.

    [어디 나와 한번 겨루어 봅시다.]

    공자는 말을 마치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가운데로 나선다.
    목역은 그의 인품이 수려하고 풍채 또한 늠름한 것을 보고 마음이 흐믓했으며 소녀 역시 마음이 끌림을 느꼈다.
    (십삼 개 성을 두루 다녀 보았지만 이렇게 훌륭하게 생긴 사람을 대해 본 일이 없는데 무예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가 없구나?)
    외투를 벗고 공자를 향해 가볍게 인사를 했다. 공자도 답례를 하고 빙그레 웃는다.

    [자, 아가씨가 먼저....]

    목역이 공자를 향해 옷을 벗으라 했지만 공자는 괜찮다고 했다.
    구경꾼들은 목씨 부녀의 무예를 보았기 때문에 공자의 거만스런 태도를 보면서 골탕을 먹었으면 꼴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 중에는 또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목씨 부녀가 강호를 두루 돌아다녀 본 사람들인데 설마 왕손 공자를 난처하게 만들지는 않을 게고 적당히 체면을 세워 줄걸세.]

    소녀가 공자를 향해 먼저 공격하라고 사양을 한다. 그 공자는 가벼운 두루마기 소매 바람을 풀썩 일으키며 몸을 오른쪽으로 돌리고 왼손의 소매 바람으로 몸 뒤에서부더 소녀의 어깨를 겨누고 쉭 하고 후려친다. 소녀는 그의 솜씨가 비범함을 보면서 가볍게 놀라며 몸을 숙여 소매 밑으르 살짝 미끄러져 빠진다. 그러나 공자의 솜씨도 여간 빠르지 않다. 그가 막 빠져 나가려 하자 오른손 소매 바람으로 얼굴을 후려치려 한다. 앞에도 소매 마람, 머리 위도 소매 바람, 피할 수 없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소녀가 왼발로 살짝 땅을 찍자 몸은 마치 활줄을 떠난 화살처럼 뒤로 뛰어 피했다. 솜씨의 변화가 어찌나 민첩한지 허리와 다리에 보통의 내공을 지니고서는 이림없는 동작이다.

    [좋구나!]

    공자도 찬사를 보내며 그가 채 땅에 떨어지기 전에 쫓아 들어 다시 한 번 소매바람을 세차게 날린다. 소녀는 몸을 허공에서 꺾으며 상대방 코를 발길로 찬다. 공격과 수비를 동시에 취하는 행동이다. 공자도 어쩔 수 없이 오른쪽으로 번쩍 뛰어 피했다가 두 사람이 동시에 땅에 띨어졌다. 공자의 세 차례에 걸친 공격도 보통이 아니거니와 소녀의 수비 또한 기민하기 이를 데 없다. 둘은 서로 마음속으로 탄복하면서 서로 바라다본다. 소녀가 얼굴을 살짝 붉히고 갑자기 공세를 바꿨다. 두사람이 어울려 숨가뽄 공방전이 벌어진다. 공자의 휘날리는 비단 도포자락이 번쩍이며 소녀의 빨간 옷깃과 어울려 한 송이의 커다란 꽂이 핀다.

    곽정은 옆에서 넋을 잃고 지켜보면서 이상한 생각이 든다. 두 사람의 나이가 자기와 비슷할 텐데 어쩌면 저토록 훌륭한 무예를 익혔단 말이나?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는 김탄하면서 부러운 마음까지 생긴다. 그들 둘이 나이도 비슷하고 용모 또한 출중하니 만일 그들이 부부만 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으랴? 그는 벌써 그 공자가 술집에서 자기에게 헹한 무례에 대한 미움도 잊고 그가 이기기를 바랐다. 곽정이 입을 벌린 채 흥미진진하게 구경을 하고 있는데 소녀가 공자의 소매깃을 잡아채자 북 하고 찢어졌다. 소녀는 펄쩍 뛰어오르면서 그 옷깃을 허공을 향해 내휘두른다. 이때 목역이 앞으로 나선다.

    [잠깐만, 공자께서는 외투를 벗으시고 다시 승부를 가리시지요.]

    공자가 잠시 셍각을 해 보더니 비단도포의 옥으로 만든 단추를 끄르자 한 명의 종이 나서서 옷을 벗겨 준다.
    속에는 호수처럼 파란 단자의 중의를 입고 허리에는 초록색 수건을 둘렀다. 관옥같이 흰 얼굴과 빨간 입술에 그 옷이 더욱 아름답게 빛난다. 그는 왼손의 장풍을 허공에 날려 온다. 있는 힘을 다 발휘한 모양이다. 한 가닥 장풍에 소녀의 옷깃이 바람을 타고 휘날린다. 곽정과 목역, 소녀가 모두 깜짝 놀란다.

    [저토록 수려하게 잘 생긴 귀공자가 어디서 저렇게 무시무시하고 흉흉한 무예를 익혔을까?]

    두 사람이 어울려 다시 수초를 겨룬다. 곽정은 생각했다.

    [저자의 장법이 언젠가 밤에 나와 다투던 어린 도사 윤지평과 같으니 혹시 그 둘이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에 그 공자는 다시 더 양보함이 없이 맹렬한 장풍을 날리며 소녀를 공격했다. 소녀도 방어와 공격을 시도해 보지만 도저히 공자의 적수가 아니었다. 공자의 공력은 윤지평보다도 더 상위에 있는 듯 아무래도 이 혼사는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목역도 쌍방의 우열을 확인한 듯,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말문을 연다.

    [염아(念兒)야, 더 겨룰 것 없다. 공자가 너보다 띌씬 우세하구나.]

    어울려 싸우고 있는 그들에게 이 말이 들릴 리 없다. 계속 혼전을 벌이고 있었다. 공자는 생각했다.
    (지금 내가 너를 해친다는 것은 여반장이다. 하지만 어딘가 좀 아까운걸.)
    갑자기 왼손바닥을 오므려 소녀의 왼팔을 나꿔챘다. 이렇게 되니 소녀는 몸을 빼려고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었다. 밀고 잡아당기다가 소녀는 비틀비틀 막 쓰러지려고 했다. 공자가 오른팔을 돌려 소녀를 뒤로 끌자 그만 그의 품속에 안겨 버리고 말았다. 구경꾼들이 갈채를 보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소녀는 부끄러움에 일굴을 붉힌다.

    [놓으세요!]
    [날 오빠라구 부르면 내 놓아주지.]

    소녀는 그의 경박항이 미웠다. 있는 힘을 다해 빠져 나오려고 했지만 빠져 나올 수가 없다. 목역이 앞으로 나섰다.

    [공자께서 이기셨습니다. 자 소녀를 풀어 주세요.]

    공자는 너털웃음을 더뜨러며 여전히 껴안고 있다. 소녀는 급한 나머지 공자의 태양혈(太陽穴)을 걷어찼다. 공자는 오른쪽 어깨를 풀며 손을 들어 날아오는 소녀의 발을 잡아 버렸다. 소녀는 당황한 나머지 있는 힘을 다해 발을 빼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렇게 되자 비단신이 밧거지며 겨우 몸만은 그의 품에서 빠져 나올 수가 있었다.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이고 하얀 양말만 어루만지고 있었다.
    공자는 히히덕거리며 비단신을 코에 갖다 대고 냄새를 말는 체 했다. 구경꾼 중의 무뢰배들이 재미있다는 듯 웃어 댄다.

    [냄새 좋겠다!]

    목역도 따라 웃는다.

    [공자의 존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물을 것 없소.]

    공자가 웃으며 비단외투를 걸쳐 입으면서 소녀를 한 번 건너다본 후 비단신을 몸안에 쑤셔 넣었다.

    [우린 서성대가(西城大街)의 고승(高陞) 여관에 묵고 있는데 함께 가서 얘기나 합시다.]

    목역이 말을 꺼냈다.

    [시간이 없는데 무슨 얘기를 하자는 게요?]

    목역이 정색을 한다.

    [소녀를 이겼으니 마땅히 아내로 맞으셔야지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공자가 앙천 대소를 한다.

    [그냥 장난삼아 해 본 건데 무슨 그런 얘기요. 하하하.]

    목역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말을 잃었다.

    [그럼 당신은....]

    그러자 공자의 수종이 나선다.

    [우리 공자님이 어떤 신분이시라구, 강호에 떠도는 당신 같은 미천한 사람과 혼사를 논한단 말오? 할 일 없거든 돌아가 낮잠이나 자구료.]

    목역은 화가 치밀어 되는 대로 손바닥으로 녀석을 후려쳤다. 이빨이 반이나 빠지며 나가 떨어진다. 공자도 더 할 말이 없어 다른 종자들에게 녀석을 부축하라고 이르고 말에 타려고 한다. 목역은 정말 화가 났다.

    [그래, 당신은 심심풀이로 내 딸을 가지고 논 거요?]

    공자는 대답도 하기 않고 말에 올라탔다. 목역은 손을 뻗어 공자의 어깨를 잡았다.

    [좋다, 나도 너 같은 경박한 소인에게 딸을 주고싶지 않다. 그러니 신발이나 내놓고 가거라.]
    [신발이야 자기가 나 주고 싶어 준 건데 당신과 무슨 상관이오?]

    어깨를 흔들어 목역의 손을 떨군다. 목역은 전신을 부들부들 떤다.

    [어디 이 놈 너 죽고 나 죽자!]

    허공에 뛰어오르며 두 주먹으로 양쪽의 태양혈을 내리친다.
    공자는 말안장에서 풀썩 뛰어내리며 웃는다.

    [이번에도 내가 이기면 사위 되라는 밀은 못 할 테지.]

    구경꾼들은 이 공자가 힘만 믿고 무례한 짓을 함부로 하는 데 대해 분노를 품고 지켜보고만 있었다. 목역은 아무 말 없이 허리끈을 졸라매고 제비가 물 차듯 땅에서 솟구쳐 올라오며 공자를 향해 질풍같이 공격해 들어갔다. 공자가 그가 화가 난 터여서 만약 걸려들기만 하면 큰 일이라 싶어 몸을 비틀며 왼손 바닥을 밖으로 뻗으며 상대방의 배를 찌른다. 목역은 몸을 한쪽으로 비스듬히 피하며 두 손의 손가락을 모아 적의 견정혈(肩井穴)을 찔렀다.
    솜씨가 보통이 아님이 역력히 드러나 보인다.

    공자도 무공에 정통한 사람이라 왼쪽 어깨를 살짝 낮추며 상대의 손가락을 피함과 동시에 왼손의 장풍을 거두면서 오른손의 장풍을 날렸다. 그러나 상대의 술수에 말려들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목역이 다시 왼쪽 어깨를 숙이며 팔꿈치를 손바닥에 댄 채 오른손 주먹을 옆으로 휘들렀다. 공자가 고개를 숙여 피하려 한다. 이 틈을 타서 두 손바닥을 모아 적의 양쪽 볼을 공격했다.
    공자도 상대의 무공을 경시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권술(拳術)의 조예가 이토록 신출 귀몰할 줄은 몰랐다. 갑자기 두 손을 날리면서 손가락을 전광 석화처럼 놀려 목역의 손등을 찔러 낚시처럼 구부려 잡아당기며 훌쩍 뛰어 몸을 날리니 열 개의 손가락이 시뻘겋게 물이 들었다. 구경꾼들은 놀라 소리를 지르고 목역의 손등엔 선혈이 낭자했다. 소녀는 화도 나고 조급하기도 했다. 재빨리 대들어 부친을 부축하면서 옷깃을 찢어 상처를 매준다. 목역은 딸을 한쪽으로 밀어붙인다.

    [비켜라, 오늘 저놈을 죽이지 못하면 나라도 죽겠다.]

    소녀의 고운 얼굴이 순간적으로 처참해지더니 공자를 바라다보고 품속에서 비수를 꺼내 자기 가슴을 푹 찌르려 했다. 목역이 깜짝 놀라 자기 상처도 들볼 새 없이 손을 뻗어 막는다. 소녀가 미처 손을 거둘 새도 없이 아비지의 손바닥이 또 찔리고 말았다.
    구경꾼들은 피투성이가 된 목역 부녀를 바라다보며 고개를 흔들고 한숨을 내쉰다. 일이 이렇게 되자 곽정은 더 참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때 공자는 다시 말에 올라가려고 했다. 곽정이 어깨를 부르르 떨며 사람들을 가볍게 밀치고 앞으로 나섰다.

    [여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소? 당신의 잘못이오.]

    공자는 곽정을 보더니 순간적으로 당황해 하다가 웃는다.

    [뭐가 잘못이오? 그래 어쩌란 말이오?]

    그 수하의 종자들이 곽정이 시골뜨기차림인 데다가 말까지 사투리 투성이인데, 공자가 그의 말투를 흉내 내는 것을 보고 한바탕 웃음을 터뜨린다.
    곽정은 그들이 왜 웃는지 몰라 어리벙벙했다. 정색을 하고 다시 말문을 연다.

    [마땅히 저 소녀를 아내로 맞이해야 하오!]

    공자는 고개를 꼬고 시시덕거리며 웃는다.

    [그래 내가 아내로 맞이하지 않으면 어쩌겠소?]
    [아내로 맞고 싶지 않은데 무엇 때문에 무예를 겨루러 대든 게요? 저 깃발에 분명히 씌어 있지 않소? 무예로 신랑을 구한다고.]
    [그래, 도대체 어쩌자는 게요?]
    [이 아가씨가 예쁘고 또 무예도 훌륭한데 왜 싫다는 게요? 이렇게 훌륭한 아가씨를 저버리고 어디 가서 또 이만한 색시를 구하겠소?]
    [사리를 모르는 사람이군. 당신과 말해야 소용없겠소.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누구의 문하요? 당신과 도화도 황약사와는 무슨 관계가 있소?]

    곽정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든다.

    [내 사부가 누군지 말할 필요도 없소. 그리고 난 황약사란 사람은 알지도 못하오.]
    [그럼 도화도의 독특한 비밀인 점혈(點穴)술은 누구한테 배웠단 말이오?]
    [점혈술은 내 둘째 사부께 배웠소.]
    [둘째 사부가 도대체 누구요?]
    [말할 수 없소.]
    [하고 안 하고는 제 맘이겠지.]

    몸을 돌려 가려고 한다. 곽정이 손을 뻗어 막는다.

    [응? 왜 또 가려고 그러오?]
    [왜?]
    [저 소녀를 아내로 맞으라 하지 않았소?]

    공자가 냉소를 머금고 또 가려고 했다. 븍역은 곽정의 의르운 행동을 보면서 자기가 나섰다.

    [여보, 젊은이 내버러두시오. 내 목숨이 있는 한 이 치욕의 원수는 꼭 갚으리다.]

    목소리를 늪여 공자를 향해 소리를 지른다.

    [이봐, 성명이나 알리고 가라구!]

    공자는 여전히 웃는다.

    [장인이라고 않겠다는데 이름은 물어 무얼 하오.]

    곽정은 대노하여 달려가 소리를 지른다.

    [그럼 이 아가씨의 신발이라도 주고 가구료!]
    [왜 건방지게 남의 일에 끼어들어? 그 아가씨릍 사랑하는 모양이로구먼.]

    곽정이 머리를 흔든다.

    [그건 아니오. 도대체 신발을 돌러줄 거요 안 줄 거요?]

    갑자기 몸을 날려 왼손을 위와 오른쪽으로, 오른손은 아래와 왼쪽으로 흔들며 동시에 공자의 두 팔의 맥문(脈門)을 잡아버렸다. 공자는 놀랍기도 하거니와 화도 치밀어 올라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뿌리칠 수가 없어 소리를 지른다.

    [죽고 싶으냐?]

    발을 들어 곽정의 사타구니를 걷어찬다. 곽정은 두 손의 힘을 모아 공자를 집어 던졌다. 공자의 경신술 대단하다. 어깨가 땅바닥에 부딪쳐 띨어지는 순간 오른발을 땅에 샅짝 대며 비틀거리고 섰다.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한 번 지고 만 결과다. 그는 비단 외투를 벗어 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아니 이놈이 살고 싶지 않은 모양이로구나.]

    곽정이 또 머리를 내흔든다.

    [내 무엇 때문에 당신과 싸우겠소. 저 소녀를 아내로 맞이하지 않겠거든 신발이나 되돌려 주란 말이오.]

    구경꾼들은 또 한바탕 신나는 구경을 하게 되나보다 했는데 곽정이 움츠리는 것을 보고 실망의 눈치를 보인다. 그 공자는 아무래도 곽정이 만만찮아 보여 질린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겁을 먹고 신발을 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 다시 비단 외투를 어깨에 걸치고 차디찬 미소와 함께 몸을 돌렸다. 곽정이 외투자락을 잡는다.

    [아니 정말 그냥 가려구?]

    공자는 순간적으로 꾀가 생졌다. 어깨를 들썩 외투를 벗어 곽정의 머리 위에 씌우고 보이지 않는 틈을 이용해 두 손의 장풍으로 곽정의 갈빗대를 무섭게 후려쳤다.



    第 十七 章. 귀에 익은 목소리


    곽정은 눈앞이 캄캄해지며 동시에 강한 장풍이 자기의 가슴에 엄습함을 느끼면서 슴을 내쉬고 가슴을 오므렸지만 때는 이미 늦어 퍽퍽 두 번이나 얻어맞고 말았다. 다행히도 그는 단양자 마옥에게 2년 동안이나 현문의 정종인 내공을 익히지 않았던가? 두 번이나 장풍에 얻어맞은 곳이 한없이 아프기는 했지만 부러지거나 내상을 입은 것은 아니다. 위급한 나머지 두 발로 아홉 번이나 계속하여 상대를 공격했다. 질풍과 같고 전광 석화 같은 재빠른 동작이었다. 이는 마왕신 한보구가 자랑하는 평생의 묘기다. 그의 발길에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남북의 호한들이 짓밟히기도 한 바로 그 재주다. 곽정이 비록 사부의 공력에 미칠 바는 아니지만 그 공자도 손발을 허우적거리며 일곱 번까지는 피할 수 있었지만 마지막 두 개는 결국 그의 좌우의 두 넓적다리에 맞고 말았다.

    두 사람은 펄쩍 뛰어 뒤로 물러섰다. 곽정은 그의 머리에 씌워졌던 비단 외투를 재빨리 집어던졌다. 그가 몽고에 있을 때는 정직과 성실만을 보고 또 배웠던 것이다. 그러나 뒤에 와서 보고 당하는 일마다 이상야릇하기만 하다. 찰목합이 친형제나 다름없는 의형을 배반한 일이며, 황하 사귀가 염치 불구하고 나이 어린 자기와 대결한 일이며, 이 공자가 무예를 져루어 이기고도 신의를 배반하여 한 소녀의 가슴을 멍들게 한 일이 모두 그렇다. 자기가 나서서 옳고 그름을 밝히자는 데도 계략을 써서 독수(毒手)를 뻗다니, 만일 자신이 내공을 익히지 않았더라면 두 번의 장풍에 늑골이 부러지고 내장이 상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생각할수록 괘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 공자도 두 번이나 발길에 차이고 파가 났다. 몸을 번쩍 날려 곽정 가까이 접근하여 왼손의 장풍으로 곽정의 어깨를 내리쳤다. 곽정이 손을 들어 막으려 하자 가슴이 뜨끔했다. 깜짝 놀라 몸을 움츠리는 순간 그 공자가 발을 걸어 땅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공자의 수종들이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그 공자가 엉덩이의 먼지를 툭툭 털면서 냉소를 머금고 말을 건넨다.

    [그따위 무공을 믿고 시건방지게 끼어들어? 집에 돌아가 사부들께 이십 년만 더 배우고 오거라.]

    곽정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숨을 들이마시며 가슴을 어루만져 통증을 가라앉혔다. 공자가 막 가려는 것을 보고 쫓아가 소리를 지른다.

    [이 주먹을 받아라!]

    팔꿈치를 낮추고 주먹을 높이 들어 그의 뒤동수를 치자 그 공자는 샅짝 머리를 낮춘다. 곽정이 다시 왼손 주먹으로 아래로부터 위를 향해 상대의 뺨을 후려친다. 공자가 어깨를 들썩 하고 막자 두 사람의 어깨와 어깨가 퍽 하고 맞붙는다. 둘은 서로 있는 힘을 다해 상대를 민다. 힘은 곽정이 센 편이요, 무공은 공자 쪽이 깊은 편이라 팽팽하게 맞설 뿐이다. 곽정이 숨을 들이마시고, 어깨에 힘을 주려고 하는 찰나 상대의 어깨 힘이 살짝 빠지며 곽정이 제 힘에 견디지 못하고 비틀거린다. 하체를 안정시키려 하는 순간 벌써 등뒤로 상대의 장풍이 날아왔다. 곽정도 되돌아서며 장풍을 날렸지만 힘이 약했다.

    그 공자의 손바닥이 떨리는가 싶었는데 곽정이 또 한 번 벌렁 나가 자빠진다. 땅에 띨어지는 순간 팔꿈치로 땅을 짚어 몸을 튕기면서 허공에서 반 바퀴나 원을 그리다가 옆차기로 그 공자의 가슴을 차 버렸다. 구경꾼들이 그의 민첩한 동작에 감탄하여 박수를 쳤다. 공자가 몸을 왼쪽으르 비스듬히 틀면서 두손으로 맞선다. 한쪽으로 적을 교란시키며 동시에 공격을 퍼붓자는 것이다. 곽정도 즉시 분근착골수(分筋錯骨手)를 전개하여 두 손을 춤추듯 움직이며 적의 관절과 혈도를 노리고 대든다. 그 공자도 일찌기 사부로부터 이 분근착골수를 배운 바 있다.
    그러나 곽정의 지금 솜씨는 묘수서생 주총이 창안한 것으로 중원의 명사들 사이에 전수되고 있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 공자는 곽정의 공격이 날카로움을 보고 자기도 장법을 바꾸어 분근착골수로 맞선다. 두 사람의 동작이 비슷한 것 같지만 그 수법은 상이하다. 하나는 식지와 중지를 펴서 상대방의 봉미혈(鳳尾穴)을 노리고 다른 하나는 상대의 관절을 잡아 비틀려는 것이다. 치고 받고 7,80초를 다투어 보면서 밥 한 사발 다 먹을 시간을 버텨 보았지만 승부를 가리기 힘들었다. 그 공자는 오래 버티기가 힘들었던지 허를 보여 앞 이마를 드러냈다. 곽정은 이 틈을 노려 손가락으로 상대방의 현기혈(玄機穴)을 찌르려다가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내가 무슨 철천지 원수를 진 것도 아닌데 살수(殺手)를 쓰랴?)
    손가락 끝을 구부려 혈도 근처를 찔렀다.

    그 공자는 곽정의 속마음을 들여다본 것처럼 오른쪽 어깨로 곽정의 두 어깨를 떠밀면서 왼손 주먹으로 세 번이나 세차게 곽정의 허리께를 내질렀다. 곽정이 급히 허리를 숙여 몸을 움츠리며 장풍을 날려 그 공자의 허리를 반격했다. 공자는 곽정의 반격을 예견한 듯 오른팔로 그의 오른팔을 꺾어 나꿔챔과 동시에 오른발 넓적다리로 곽정의 오른발 넓적다리를 내지르니 곽정은 비틀거리다가 펑 하고 또 한 번 나가 넘어지고 말았다. 목역은 딸이 양손의 상처를 다 싸 주자 깃밭 아래 서서 관전을 하다가 곽정이 세 차례나 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 공자의 적수가 아니라고 생각했던지 달려들어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여보 젊은이, 우리 갑시다. 저 같은 못된 놈과 상대할 필요가 없겠소!]

    곽정은 어찌나 세게 넘어졌든지 어질어질 눈앞애 별이 왔다 갔다 하면서 노기가 충천했다. 붙드는 목역의 손을 뿌리치고 주먹과 장풍을 쓰면서 공자를 향해 대든다. 그 공자는 곽정이 이렇게까지 나오리라고는 생각치 못했다. 뒤로 서너 발짝 물러서서 말문을 연다.

    [그래도 계속 대들 셈이냐?]

    곽정은 대꾸도 하지 않고 여전히 공격이다.

    [계속 귀찮게 굴면 정말 죽여 버릴 테다!]
    [좋다. 신발을 내놓을 때까지 어디 해 보자!]

    그 공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는다.

    [그 아가씨가 친동생도 아닐 텐데 죽어도 날 매부라고 하고 싶어 그러는 겐가?]
    [나는 그 여자 알지도 못하오. 누가 내 친동생이라고 합디까?]

    그 공자는 우습기도 하고 화도 나는 모양이다.

    [이 바보야, 내 솜씨나 보거라!]

    두 사람은 어을려 엎치락 뒤치락 또 싸우기 시작했다.
    곽정은 이번만은 정신을 차리고 맞섰다. 여러 차례 그 공자가 흉계를 써 봤지만 말려들지 않는다. 무공으로 따진다면 그 공자 쪽이 약간 우세한 편이다. 그러나 이쪽은 투지가 왕성했다. 거의 또 반 시간 이상이나 싸웠다. 곽정과 그 공자가 싸우기 시작한 것이 오각(午刻)부터인데 지금은 벌써 미말 신초(未末申初)다. 그동안 구경꾼들은 더욱 몰려들어 광장은 인산 인해다.

    목역은 강호를 두루 돌아다녀 본 사람이다. 이러다가 관가에서라도 알게 되는 날에는 일만 더욱 커지고 골치를 앓게 될 것은 뻔한 일이다. 그렇다고 자기를 두둔해 나선 사람을 두고 자기만 자리를 피할 수도 없는 입장이라 옆에서 구경을 하면서도 몹시 초조했다. 구경꾼들을 휘둘러보니 눈이 부러부리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풍채나 기개가 있어 보이는 사람에, 괴상한 복장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먼, 보검을 어깨에 짊어진 사람 등 각양각색이다. 허다한 무림의 인물들이며 강호의 호걸들까지 그중에 섞여 있었다. 구경꾼들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관전만 하는 사람, 귀엣말로 의논이 분분한 사람, 심지어 <누가 이기느냐>고 내기를 거는 사람까지 있었다.

    목역은 발걸음을 천천히 옮겨 그 공자의 수종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 보았다. 수종 가운데 인상이 이상한 사람 셋이 눈에 띈다. 그 중 한 사람은 빨간 가사(袈裟)에 금빛이 찬란한 고깔을 쓰고 있었는데 체격이 장대하여 머리도 다른 사람들보다 두 배는 더 커 보인다. 두번째 사람은 몸집은 중간인데 흰 머리카락이 은빛처럼 빛나면서도 얼굴엔 주름살 하나 없는 홍안이다. 꼭 전설에 나오는 동안 백발이다. 잘 생긴 풍채가 도대체 몇 살이나 되었는지 알 수가 없게 한다. 세번째 사람은 작달막하고 단단하게 생긴 체격에 눈에 핏발이 서 있으면서도 눈빛은 날카롭게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목역이 마음속으로 놀라는데 한 수종의 말소리가 들린다.

    [영지상인(靈智上人) 어른께서 저 녀석을 좀 쫓아 보내 주시지요. 더 싸우다 왕자께서 실수라도 해 다치시는 날에는 저희 하인들은 죽습니다.]

    영지상인이라고 하는 중은 웃기만 하고 대답도 하지 않는데 그 백발의 노인이 웃으며 입을 뗀다.

    [설마하니 볼기나 칠 테지 죽이기야 하겠나?]

    이 말을 들은 목역은 소스라치게 놀란다.
    (이 공자가 원래 왕자였구나. 더 싸우다간 큰 일이 벌어지겠다. 보아하니 이 중들은 모두 왕부에서 초빙한 무림의 고수들인 모양인데 왕자의 수종들이 일이 빌어질까 봐 쫓아가 데려온 모양이로구나.)
    다시 또 작달막한 남자의 말소리가 들런다.

    [왕자의 무공이 저 녀석보다 뛰어난데 뭘 걱정하고 있어?]

    키는 작지만 목소리만은 종을 치듯 맑고 크게 울린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바라다보다가 그의 번쩍이는 눈빛에 놀라 고개를 숙이고 만다.
    그러자 백발의 노인이 웃는다.

    [왕자가 저토록 흘륭한 무예를 가지고 사람들 많은 데서 한 번 보여 주지 않는다면 십 년 공부 나무아미 타불 되라구? 누가 나서서 도와만 보게. 틀림없이 화낼걸.]

    작달막한 남자가 이번엔 목소리를 낮추어 소곤거린다.

    [양공(梁公) 왕자의 장법이 어느 문하의 무공인지 어디 한 번 맞혀 보세요.]

    그러자 백발 노인이 하하거리며 웃는다.

    [호형(虎兄)께서 이 형님을 한 번 시험해 보시겠다는 건가? 자, 보오. 장법의 날램과 기민함이며 허와 실의 변화무쌍함이 틀림없는 전진교 문하의 솜씨가 아니겠소?]
    [그것 참 이상하다. 전진교 도사들이 사람마다 괴짜지만 또 어떻게 해서 왕자에게 무예를 가르치게 되었는고? 알다가도 모를 일인걸.]
    [그야 뻔하지, 여섯째 왕자가 신분을 들보지 않고 아무나 사귀는데 그야 어떤 사람에게고 못 배울 리 있겠나? 당신과 같이 산동, 산서를 종횡하는 호걸도 다 이 왕부에 모여 왔는걸.]

    땅딸보가 고개를 끄덕인다. 백발 노인은 가운데서 싸우고 있는 두 사람에게 시선을 옮겼다. 곽정의 장법이 바꿔그 초법(招法)을 늦춰 철통 같은 방비만 하고 있었다. 공자가 맹렬한 공격을 몇 차례 퍼부었지만 그의 묵직한 장법에 울려 되돌아오고 만다. 다시 옆에 있는 땅딸보에게 말을 건다.

    [호형, 저 어린 녀석의 무공은 어디서 배운 것 같소?]

    그러자 잠시 머뭇거린다.

    [저 녀석 무공은 매우 복잡한데, 아두래도 한 사람의 사부에게서 배운 것이 아닌 것 같군요.]

    옆에 있던 다른 사람이 말을 받는다.

    [팽(彭) 채주(寨主) 말씀이 옳아요. 바로 강남 칠괴의 제자입니다.]

    목역이 그를 바라다보니 파란 얼굴에 깡마른 편이요, 게다가 이마에는 혹이 세 개나 있었다.
    (이자가 저 사람을 팽채주라고 부르는데, 그렇나면 이 땅딸보가 바로 도둑떼의 괴수란 말인가? 강남 칠괴의 이름은 들은 지 오래 됐는데 아직도 살아 있었더란 말이냐?)
    이 생각 저 생각 곰곰 해 보는데 그 파란 얼굴의 깡마른 자가 버럭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른다.

    [아니 저 쥐새끼 같은 녀석도 여기 있었구나?]

    떨그렁 떨그렁 옷보통이에서 갈레진 짤막한 쇠붙이를 꺼내 들고 몸을 날려 가운데로 나섰다.
    원래 파란 얼굴의 깡마른 이 사람은 바로 황하사귀의 사숙이라는 삼두교 후통해었다, 구경꾼들은 그가 병기를 들고 나오는 것을 보자 어느 한쪽을 도와 주려고 하는 줄 알고 큰소리로 외쳐댔다. 목역은 그가 팽채주와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왕자 부중에 속한 인물로 알고 두 손을 열십자로 비스듬히 걸친 채 몇 발짝 나섰다. 만일 곽정에게 손만 대면 자기도 대들 생각이다.
    그런데 후통해는 곽정에게 대드는 것이 아니라 맞은편에 있는 사람들 틈을 뚫고 들어간다. 얼굴이 검정투성이이고 옷이 남루한 소년 하나가 대드는 그를 보고는 <아이쿠!> 소리를 지르며 도망을 친다. 후통해가 뒤를 쫓고 그의 뒤에 서 있던 황하 사귀도 쫓아갔다.
    곽정은 그 공자와 열을 내어 싸우고 있다가 후통해가 쫓고 있는 소년이 새로 사귄 황용과 비슷한 것을 보고 순간적으로 놀랐다. 이 틈을 다서 공자는 곽정의 다리를 힘껏 걷어찼다.

    [잠깐만, 내 좀 나갔다가 이따 또 싸우자!]

    그 공자는 냉소를 한다.

    [곱게 졌다그 할 일이지 잔소리는....]

    곽정은 황용의 안위가 걱정스러워 더 싸울 흥미가 없었다. 막 황용이 달아난 길로 쫓아가려고 하는데 황용이 신발을 질질 끌고 시시덕거리며 이쪽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보이고 그 뒤에 후퉁해가 노기 충천하여 따라오고 있었다. 후통해는 갈라진 쇠붙이를 흔들며 황용의 등을 찌르려 한다. 그러나 황용의 몸놀림이 어찌나 빠른지 요리조리 미꾸라지처럼 빠지며 찔리지도 않고 후통해의 화만 돋운다.
    후통해가 들고 있는 쇠붙이는 끝이 세 쪽으로 갈라져 있고 햇빛에 번쩍번쩍 빛을 발하고 있었다. 후통해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본 구경꾼들이 한바탕 웃음을 터뜨린다. 그의 앙쪽 볼 위에 황용의 때묻은 손에 얻어맞은 뺨 자국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후통해가 이리저리 사람 틈을 비집고 나오면 황용은 빌써 저만큼 가서 상대를 놀리고 있다.

    [내 저 쥐새끼 같은 놈의 가죽을 벗기거나 뼈를 분지르지 못하면 내 성을 갈겠다.]

    화가 나서 씨근덕거리며 계속 뒤를 쫓는다. 그러면 황용은 기다리고 있다가 그가 접근해 오면 또 살짝 피한다. 이때 저쪽에서 세 사람이 숨을 헐떡거리며 이쪽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바로 황하 삼귀다. 상문부 전청건만 보이지 않는다.
    곽정은 황용의 몸놀림을 보고 그제야 번쩍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원래 굉장한 절기(絶技)를 믐에 지니고 있었구나. 며칠 전 장자구의 솔숲에서 후통해를 유인하고 황하 사귀를 나무 위에 매단 것이 모두 황용이 한 짓이구나!)

    저쪽의 영지상인 등도 의논이 분분하다. 영지상인은 원래 서장밀종(西藏密宗)의 고수로 대수인(大手印)을 쓰는 법을 수련했다. 동안 백발의 노인은 그 이름이 양자옹(梁子翁). 장백산(長白山) 무학 일파의 종사(宗師)인데 어려서부터 산삼과 여러 가지 약초를 먹고 자라 늙어서도 늘 동안이요 게다가 무공까지 뛰어나 사람들이 그를 삼선 노괴(參仙老怪)라고 불렀다. 이 삼선 노괴란 별명은 또 두 가지로 나뉜다.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은 <삼선>이라 하고 그 일파의 제자들이 아닌 사람은 그냥 <노괴>라고만 했다.
    눈이 번개처럼 빛나는 남자는 중원에서 더욱 그 명성을 날리고 있는 인물이다. 이름은 천수인도(千手人屠) 팽련호(彭速虎)다. 어린아이나 부녀자들까지 다 알고 있어서 대강 남북에서는 어린이들이 울기만 하면 <팽호랑이 온다>고 하면 뚝 그친다.
    삼선 노괴 양자옹이 먼저 말문을 연다.

    [내가 관외(關外)에 있을 때, 귀문용왕은 대단한 고수라고 들어왔는데 그 제자들이 저리도 못났는가? 어린애 하나도 어쩌질 못하고 있다니....]

    팽련호는 이마를 찡그린 채 아무 말이 없다. 그는 귀문용왕 사천통(沙天通)과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핀이다. 삼두교 후통해가 놀랄만한 무공을 지니고 있음을 잘 알고 있는데 오늘 어쩌다 저 모양으로 망신을 당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황용과 후통해가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곽정과 공자의 싸움은 잠시 멈출 수 밖에 없었다. 그 공자도 한 시간 이상이나 다투는 사이에 곽정을 5,6차 때리고 넘어뜨리기는 했지만 자기도 지쳤는지 허리에 차고 있던 수건을 끌러 이마 위의 땀을 씻고 있었다.
    목역은 <비무초친>이다고 쓴 깃발을 든 채 곽정의 손을 어루만지며 위로를 하고 여관으로 가 쉬면서 얘기나 하자고 권했다. 이때 또 질질 신발 끄는 소리를 내며 황용과 후퉁해가 쫓고 쫓기며 달려왔다. 황용의 손에는 형겊 조각이 들려 있고 후통해의 옷은 찢어져 하얀 내복이 드러나 보었다. 좀 지나자 오청렬과 마청웅이 각기 창과 채찍을 든 채 헐레벌떡 달려왔지만 이때 황용과 후통해는 벌써 멀리 사라진 뒤다.

    구경꾼들은 이상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이배 서쭉에서 시끌시끌 떠드는 소리와 함께 10여 명의 건장한 나졸들이 손에 등나무 채찍을 휘두르며 길을 열고 있는 모습이 보었다. 길모퉁이에서 한 채의 비단으로 수놓은 가마를 6명의 장한이 멘 채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공자의 수종들이 왕비께서 오신다고 큰 소리를 지른다. 공자가 양 미간을 찌푸리고 못마땅한 듯 욕을 퍼붓는다.

    [어느 놈이 왕비께 알려 오시게 했느냐?]

    수종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가 가마가 당도하자 몰려가 인사를 했다. 그러자 가마 속에서 낭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무엇 때문에 다른 사람과 다투고 있느냐? 외투도 입지 않고, 감기 들면 큰일난다.]

    목역은 이 말소리를 듣고 머리가 어찔하고 귀가 멍해져서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는다.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두 발이 후들후들 떨린다.
    (말소리가 어쩌면 내 아내와 뜩같을 수 있을까?)
    그러나 잠시 후 그는 혼자 싱겁게 웃는다.
    (이분은 대금국의 왕비인데 설마.... , 내 아내를 그리다가 정신이 어떻게 되는가 보다.)
    그러나 호기심에 끌려 서서히 가마 가까이 가 보았다. 가마 안에서 섬섬 옥수가 뻗어 나와 공자의 얼굴에 있는 땀과 먼지를 씻어 주며 다정하게 무어라 속삭이는 말소리가 들린다. 반은 걱정하는 말투요 반은 나무라는 투다.

    [어머니 아주 재미있었어요. 아무 일도 없었는걸요.]
    [빨리 옷을 챙겨 입어라. 함께 집으로 가자꾸나!]

    목역은 또 한 번 깜짝 놀란다.
    (원 세상에 말투나 목소리가 이처럼 똑같을 수가 있단 말이냐?)
    왕비의 수종 하나가 곽정 앞으로 다가가 공자의 비단 옷을 들며 욕부터 한다.

    [짐승만도 못한 너석이 왕자의 옷을 이 모양으로 더럽혔구나!]

    왕비를 따다온 다른 군관 하나가 등나무로 만든 채찍을 들어 곽정의 머리를 후려친다. 곽정은 몸을 살짝 피하며 채찍을 든 녀석의 팔을 잡아 비틀며 다리를 걸자 그 군관은 땅바닥에 나가 넘어졌다. 곽정이 채찍을 뺏아 들고 쉭쉭쉭 세 번이나 군관의 등을 후려 갈긴다.

    [누가 함부로 사람을 때리랬더냐?]

    옆에서 구경하던 백성들이 속이 시원하다는 듯 고소한 표정들이다. 남아 있던 10여 명의 군과들이 대들어 쓰러지 동료를 부축해 일으키며 큰소리로 욕을 하자 곽정이 양 손에 하나씩 붙들어 집어 던진다. 왕자가 대노하여 버럭 소리를 지른다.

    [그래도 이 녀석이 정신을 못 차리고 까부는구나!]

    곽정이 집어던진 두 명의 군관을 받아 땅에 내려 놓고 주먹을 날려 곽정의 배를 때린다. 곽정이 번개처럼 몸을 피하고 대들어 또 두 사람이 어우러졌다.
    왕비가 소리를 질러 만류했지만 그 공자는 어머니도 무섭지 않다는 눈치다.

    [어머니, 내 오늘 이놈에게 본때를 보여 줘아겠어요.]

    두 사람이 수십 초를 다퉜다. 공자는 자기 어머니 앞에서 솜씨를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몸을 날리며 장법을 날렵하게 놀린다.
    곽정이 견디지 못하고 두 번이나 나가 넘어진다.

    목역은 이때 싸움엔 아랑곳없이 가마만 뚫어지게 바라다보고 있었다. 가마의 주렴이 살짝 벌어진 곳에 고상한 눈매를 한 공자의 어머니가 근심스런 표정으로 왕자와 곽정의 싸움을 지켜 보고 있었다. 목역은 그의 눈빛을 바라다보면서 못으로 박아 놓은 듯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곽정은 수세에 몰리면서도 투지는 계속 왕성하다. 왕자도 살수(殺手)를 쓰면서도 다시 덤비지 못하도록 만들려는 눈치였지만 곽정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뚝심이 있는 데다 내공까지 익혀놨으니 몇 차례 주먹에 얻어맞았다 해서 쓰러질 위인도 아니다. 그러니 싸움은 계속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어울려 싸우는데 황용과 후통해가 또 한 차례 쫓고 쫓기며 달려온다.
    이번의 후통해의 꼴은 더욱 우스꽝스럽다. 머리를 판다는 광고간판까지 꽂혀 있지만 자신은 그것도 모르고 죽어라 황용의 뒤를 쫓는 데만 정신이 팔렸다. 뒤를 쫓던 황하 이괴는 어디로 갔는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황용에게 맞고 어디 쓰러진 모양이다.
    양자옹 등이 황용의 정체를 몰라 몹시 긍금하고 답딥한 눈치다. 가운데의 두 소년, 즉 곽정과 공자도 권풍과 장풍을 날리며 용호 상박으르 얽혀 누가 누군지 분별할 수 없었다. 갑자기 곽정의 어깨가 왕자의 장풍에 얻어맞았는가 하는 찰나 왕자도 곽정의 주먹에 넓적다리를 얻어맞는다. 둘의 거리가 너무 가깝게 밀착되어 피차의 숨소리까지 똑똑히 들을 수 있는 처지다.

    곽정은 계속해서 분근착골(分筋錯骨)의 묘기를 발휘하면서 그 바쁜 가운데서도 기회를 노려 혈(穴)을 찌르고 때리기에 여념이 없고, 왕자는 72로(七十二路)의 금나수(檎拿手)를 쓰고 있는데 손을 쓸 때마다 골절이 우두둑 우두둑 하는 소리가 났다. 옆에 있는 구경꾼 가운데 무예를 모르는 사람까지도 손에 땀을 쥔 채 숨소리를 죽이고 지켜보고 있었고, 무예를 아는 사람까지도 험악해진 싸움에 두려운 눈치를 보이고 있었다. 어찌나 험악한지 두 사람 중 그 어느 한쪽이 죽어 넘어지거나 중상을 입고 쓰러지기 전에는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영지상인과 양자옹도 어느 새 손에 암기를 꺼내 들고, 벌어질 사태에서 왕자를 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공력은 아무래도 곽정과 비할 바는 아니나 긴급할 때 그를 제압할 자신은 있었던 것이다.

    곽정은 더욱 투지 왕성하다. 그는 거친 사막에서 자라난 소년이요, 왕자는 아무래도 궁중에서 곱게 자란 금지 옥엽이라 곽정보다는 나약한 편이 아닐까? 이렇게 정신없이 공격과 빙어가 계속된다면 아무래도 왕자쪽이 블리하다. 곽정의 장풍이 쪼개져 내려오는 것을 보면서 번개처럼 몸을 피하고 주먹으로 반격을 했다. 빠르기 이를데 없는 솜씨다. 곽정은 반격한 주먹이 날아오는 그 빠르고 짧은 틈을 타 오른손을 뻗어 상대의 오른팔꿈치를 뒤집으며 다가서 왼쪽 어깨로 그의 오른쪽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왼손을 갈고리로 삼고 동시에 오른손으로 왕자의 목을 끌어안았다. 왕자는 그가 이렇게까지 대담하게 공격해 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재빨리 왼손의 장풍을 뒤집어 엎으면서 상대방의 팔뚝을 잡고 또 오른손으로 곽정의 덜미를 잡았다.
    두 사람의 가슴이 착 달라붙은 채 저마다 있는 힘을 다해 보는 것이다. 하나는 상대의 목에 구멍을 뚫겠다고 하고 다른 하나는 적의 팔을 분지르고 말겠다는 결사적인 순간이오, 자세였다.

    구경꾼들이 놀라 울부짖고 왕비도 주렴 밖에 얼굴을 반이나 내민 채 혈색을 잃는다. 목역의 딸은 땅에 앉아 있다가 놀다 뛰어 일어난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곽정이 엄굴에 장풍을 맞았다. 왕자가 자세를 바꾸어 오른손을 틀면서 전광 석화처럼 후려갈긴 것이다. 곽정은 눈앞이 어질어질하여 큰소리를 지르면서 두손으로 왕자의 옷깃을 틀어 쥔 채 번쩍 들어 있는 힘을 다해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분근착골의 솜씨도 아니요, 금나단타(檎拿短打)의 수법도 아니다. 몽고 사람들이 잘 하는 씨름 기법으로서 신전수(神箭手) 철별에게 배운 솜씨를 발휘한 것이다. 그러나 그 공자의 무공도 보통이 아니었다. 땅에 떨어지는 순간 허리를 굽히고 곽정의 두 발을 얼싸안은 것이다. 둘이 동시에 땅바닥에 쓰러진 것이다.

    위쪽으로 떨어진 왕자가 먼저 몸을 날려 군관이 있는 쪽으로 달려가 긴 창을 앗아들고 땅바닥에 누워 있는 곽정의 배를 찔렀다. 곽정이 떼굴떼굴 굴러 피하자 왕자는 계속 쫓아가면서 세 번이나 찔렀다.
    곽정은 누운채 공수탈백인(空手奪白刃)의 묘기를 펴, 창을 뺏으려고 손을 뻗어 보았지만 잡히지 않는다. 왕자가 창대를 비틀어 흔들자 창 끝의 빨간 끈이 흔들흔들 둥그런 원을 그린다. 곽정은 눈앞이 어질어질하여 급한 나머지 팔뚝으로 막고 억지로 밀어 내며 목역의 <비무초친>이라고 쓴 깃발을 끌어다가 깃대를 옆으로 휘둘러 막으며 일어선다. 왕자가 다시 창을 높이 쳐들고 내리찍으려 하자 곽정이 깃발을 펄럭여 날리니 깃발이 왕자의 얼굴을 가리고 창끝이 번쩍 차디찬 빛을 발하며 깃발을 뚫고 삐어져 나왔다. 곽정도 힘차게 깃발을 휘둘러 피한다.

    이제 두 사람 다 각기 무기를 든 셈이다. 곽정이 쓰는 것은 대사부 가진악이 전수해 준 항마장법(降魔杖法)인데 깃대가 너무 길어 불편하기는 하지만 장법만은 오묘하기 짝이 없었다. 원래 이 장법은 가진악이 철시 매초풍을 상대하기 위해 애써 익혀 놓은 것으로, 변화무쌍하여 상대가 이쪽의 술수를 예측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왕자가 이 장법의 오묘함을 모르고 긴 창으로 공격을 하면 깃대가 먼저 반격을 해 오기 때문에 만약 재빨리 피하지 않으면 배를 긁히게 되어 있다. 그래 할 수 없이 방어 태세만을 취할 수 밖에 없었다.

    목역은 왕자의 창법을 보면서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동작 하나 하나를 보면 볼수록 틀림없는 양가창법(楊家槍法)의 정통이다. 이 양가창법은 비록 남북이종(南北二宗)으로 나뉘고 또 종파마다 각기 다른 지류로 분류되지만 이 왕자가 쓰고 있는 창법은 양가의 독특한 무공으로 아들에게만 전했지 딸에게도 비밀을 지켜 왔던 것이다. 남방에서도 보기 드물거든 하물며 대금극의 서울에서 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목역은 한참동안 바라다보면서 어느덧 두 눈에 하염없는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정신을 잃고 싸움을 지켜 보는 그의 딸도 만 가지 심사가 교차하는 심각한 표정이다. 창 끝의 빨간 구슬이 번쩍번쩍하고 깃대 위의 깃발이 필럭펄럭하며 석양 노을에 반사되어 찬란한 무지개를 수놓고 있었다. 왕비는 이제 날이 저물기 시작한데다 아들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흐르는 것을 보며 마음이 초조했다.

    [이제 그만 싸워라!]

    팽련호는 왕비의 이 말을 듣고 가운데로 걸어 들어가 왼팔을 흔들며 깃대를 잡았다. 곽정이 손에 지독한 통증이 오는 것을 느끼는 순간 깃대는 벌써 하늘로 날아가고 깃발은 허공에서 바람에 날려 펄럭이고 있었다.
    곽정은 평생 매초풍을 제외하고 이렇게 강한 상대를 만나본 일이 없었다. 깜짝 놀라 미처 상대의 모습도 살펴볼 겨를이 없는데 바람 소리만 쉭 하며 어느 새 적의 장풍이 얼굴을 향해 엄습했다. 곽정이 재빨리 피하기는 했지만 팽련호의 1장이 그의 팔뚝을 때렸다. 곽정이 비틀거리다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팽련호가 왕자를 보고 웃는다.

    [왕자님, 제가 처리해 버렸으니 이젠 귀찮게 대들지는 못할 겝니다.]

    오른손을 뒤로 움츠리고 숨을 몰아쉬며 손바닥을 두어 번 흔들다가 맹렬하게 뻗으며 막 땅에서 일어나려는 곽정의 머리를 내리쳤다. 곽정은 어쩔 수 없이 두 팔뚝에 있는 힘을 다해 물리치려고 했다. 구경꾼 중의 고수들은 곽정의 두 팔이 부러져 나가는 줄 알았다. 천수인도 팽련호의 이 장풍에 견딜 장사는 없는 것이다.
    바로 이 순간 구경꾼 틈에서 한 사람이 소리를 질렀다.

    [잠깐만!]

    은빛의 그림자 하나가 날아들며 손에 든 이상한 병기를 허공에 휘두르며 팽련호의 팔을 휘감는다. 팽련호의 무공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오른팔로 잡아당기니 그 사람의 병기가 부러진다. 그 순간 다시 한 번 장풍을 날린다. 그 사람은 잠시 멍하니 바라다보다가 곽정의 허리를 껴안고 옆으로 뛰어 피한다.
    구경꾼들이 보니 곽정을 구하기 위해 대든 사람은 중년의 도인, 몸에는 은빛 도포를 걸치고 손에 쥔 털이개는 자루만 앙상하게 남은 채다. 거기 달려 있던 실들이 아직도 팽련호의 팔에 감긴 채다.
    그 도인과 팽련호가 서로를 건너다보다가 도인이 먼저 말을 꺼낸다.

    [혹시 팽채주(彭寨主)가 아니신지? 오늘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이올시다.]
    [원 별 말씀을.... 도장의 법호가 누구신지?]

    이때 수백의 눈초리가 그 도인에게 쏠렸다. 미목이 수려하고 턱에는 세 무더기의 수염이 근사했다. 흰 버선에 회색빛 신발, 정결한 것이 먼지 한곳 묻은데가 없다. 그 도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왼발을 한 발 내디뎠다 오므린다. 땅바닥에 가볍게 발자국을 남긴다. 북국의 메마른 땅 위에 힘도 들이지 않고 발자국을 남긴다는 것은 보통의 공력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팽련호가 깜짝 놀란다.

    [도장께서는 혹시 사람들이 철각선(鐵脚仙)이라고 부르는 옥양자(玉陽子) 왕진인(王眞人)이 아니십니까?]
    [진인이라니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제가 바로 왕처일(王處一)이옵니다.]

    도인이 머리를 숙여 겸손해 한다.
    팽련호와 삼선노괴, 양자옹, 영지상인 등은 모두 전진교 가운데서 쟁쟁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왕처일을 잘 안다. 오래 전부터 그의 이름은 들어 왔지만 만나 본 일은 없다. 그가 왕처일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아래 위를 자세히게 훑어 본다. 깨끗한 옷차림이 도사의 기풍을 십분 풍기고 있다. 방금 그가 한발을 내디뎌 발자국을 남겼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 이가 바로 천야 만야한 바위 끝에 한 발로 버티고 서서 하북의 영웅 호걸을 놀라게 한 철각선 옥양자라고 믿을 사람이 없는 그런 풍채였다.
    왕처일이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곽정을 손으로 가리킨다.

    [저는 원래 이 소년과는 모르는 처지입니다. 다만 의롭고 용감한 태도를 보고 탄복했을 뿐입니다. 외람된 청이오나 팽채주께서 그의 생명만은 살려 주셨으면 합니다.]

    팽련호는 그의 겸손한 부탁을 받고 전진교에 대해 생색을 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원 별 말씀을.... 도장의 말씀에 좇겠습니다.]

    왕처일이 머리를 숙여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머리를 돌려 무섭게 왕자를 노려본다.

    [자네 이름이 뭔가? 사부는 누구신고?]

    왕자는 왕처일의 거동을 보고 슬그머니 불안해져서 몰래 빠져 달아날 생각을 하고 있다가 엉겁결에 대답을 한다.

    [나는 완안강(完顔康)이오. 제 사부의 존함은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자네 사부의 왼쪽 볼에 빨간 점이 있지? 응 그렇지?]

    완안강은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꾹 참는다. 도인의 눈빛이 번쩍이며 자기의 마음을 궤뚫는 것 같아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내 벌써 구사형(丘師兄)의 제자인 줄 알았다. 흥, 그래 네 사부께서 네게 무예를 가르치기 전에 하신 말씀이 없었더냐?]

    완안강은 사태가 심각함을 느끼며 당황한 빛을 보인다. 그의 어머니가 가마 안에서 그를 재촉한다.

    [얘야, 빨리 돌아가자!]

    완안강은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오늘 일을 만일 사부께서 아시게 된다면 이긴 보통일이 아니다.)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겸손한 대도로 도인을 디한다.

    [도장께서 제 사부님을 아신다니 분명 제 선배가 되시겠군요. 저희 집으로 가셔서 후배에게 가르침을 주소서.]

    왕처일이 코방귀만 뀌고 아무 대답도 없자 완안강은 곽정을 향해 읍을 하고 웃는다.

    [나와 곽형은 오늘 처음 만나는 것도 아니오. 곽형의 무예엔 정말 탄복했습니다. 곽형께서도 도장과 함께 저희 집에 가십시다. 우리 이제 서로 친구가 됩시다.]

    곽정이 목역 부녀를 가리키며 입을 뗀다.

    [그럼 혼사는 어찌하려오?]

    완안강은 난처한 표정이다.

    [그 일은 서서히 생각해서 합시다.]

    목역이 곽정의 옷소매를 잡는다.

    [자. 저와 함께 가십시다. 무엇 때문에 저 따위 잡놈을 거들떠 보십니까?]

    완안강이 이 말을 듣고도 화를 내지 않고 왕처일을 향해 공손히 읍을 한다.

    [도장님. 후배는 집에서 기다리고 있겠나이다. 조왕부(趙王府)가 어디냐고 물으시면 다 알 것입니다.]

    수종들이 끌고 온 준마에 올라타며 채찍을 휘두르니 말은 달리고 사람들은 부산하게 양 옆으로 피한다. 왕처일은 그의 거만스런 태도에 화가 치미는 모양이다.

    [여보게 나를 따라오게.]

    곽정을 향해 말한다.

    [전 제 친구를 좀 기다려야겠는데요.]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황용이 어느 새 사람들 틈에서 얼굴을 내밀고 웃는다.

    [난 괜찮아요. 좀 있다 내 찾아갈께요.]

    말을 마치자마자 또 사람 틈으로 사라진다. 키가 작아 없어지면 그만이다. 삼두교 후통해가 또 멀리서 달려오는 것이 보인다.
    곽정은 우스운 생각이 들었지만 몸을 돌려 땅에 꿇어 엎드려 왕처일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생명을 구해 준 은혜에 감사를 한다. 왕처일이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고 재빨리 사람 틈을 빠져 교외를 향해 멀어진다. 일각도 되지 않았는데 그는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벌써 성 밖이다. 다시 몇 리를 더 가 산등성이를 넘었다. 왕처일은 계속 걸음을 빨리 한다. 곽정을 시험하는 것이다. 곽정도 단양자 마옥에게 경공을 익히지 않았는가? 얼굴도 붉히지 않고 숨도 헐떡거림도 없이 계속 그 뒤를 밟는다. 왕처일은 잡았던 곽정의 손을 놓으며 적이 놀란다.

    [기초가 훌륭한데 왜 그 녀석을 이기지 못했지?]

    곽정은 어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웃기만 한다.

    [네 사부는 누구냐?]

    곽정은 그날 절벽 위에서 윤지평으로 가장, 매초풍을 속인 일이 있어 단양자 마옥의 사제 가운데 왕처일이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솔직하게 강남 육괴와 마옥으로부터 무예를 익힌 일을 들려주있다.

    [대사형께서 네게 무공을 가르쳤다는데 내 무얼 망설이겠느냐?]

    왕처일은 반가운 눈치다. 곽정은 그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바라다볼 뿐이다.

    [너와 다툰 그 왕자라는 완안강은 내 사형인 장춘자 구처기의 제자다. 알았느냐?]
    [그래요? 전연 몰랐는걸요.]

    원래 단양자 마옥이 그에게 상승의 내공은 전수해 주면서도 권술이나 기타 다른 무공에 대해서는 일언 반구 비친 일이 없었다. 그래서 곽정은 전진교 무공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다. 이제 왕처일의 말을 듣고보니 어느날 밤 다툰 일이 있는 윤지평과 그 완안강의 솜씨는 같은 곳이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죄송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숙였다.

    [제자는 그가 구도장의 제자라는 것도 모르고 함부로 대들었으니 도장께서 용서하여 주십시요.]
    [아니다. 네 의협심이 대단하여 내 너를 좋아할 뿐이지 책망하는 것은 아니다.]

    하하거리며 웃고 나서 다시 정색을 한다.

    [우리 전진교 문하는 그 교육이 엄하다. 문하에서 잘못을 범하면 그 벌이 무서우니라. 그녀석 경거 망동하니 내 구사형께 아뢰어 벌을 내릴 생각이다.]
    [그가 만약 목역의 따님과 걸혼을 하겠다고 나서면 도장께서 그를 용서해 주십시오.]

    왕처일은 고개만 흔들 뿐 말이 없다. 착하기만 한 곽정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다 혼자 중얼거리듯 말한다.

    [구사형이 원래 악을 미워하기 원수처럼 하고 금나라 사람이라면 더더욱 증오를 하는데 어째서 금나라 조정의 왕자에게까지 무예를 전수하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구나.]

    고개를 돌려 곽정을 건너다본다.

    [구사형과 내가 연경(燕京)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며칠 있으면 이리로 오실 게다. 모든 일은 만나서 자세히 물어 봐야겠다. 양(楊)가 성을 가진 제자를 두었다는데 뭐 가흥에서 너와 무예를 겨루기로 되었다고 들었다. 그 양이라는 사람의 무공이 어떤지? 하지만 염려할 것 없다. 내 여기 있으니 네가 지게 버려 두진 않겠다.]

    곽정은 여섯 분 사부의 명에 따라 3월 24일 이전에 절강의 가흥에 도착해야 한다는 것만 알지 가흥에 이르러 무슨 일을 할 것이라는 말은 들어 본 일이 없다.

    [도장님, 무슨 무예를 겨룬대요?]
    [네 사부들께서 말씀이 없으셨던 모양인데 내가 먼저 말을 꺼낼 수야 없는 것이다.]

    한숨만 쉴 뿐이다. 그는 구처기로부터 얘기를 들어 전후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강남 육괴가 꼭 이겨야 한다는 집념 때문에 아직까지 18년 전에 있었던 옛일을 곽정에게 들려주지 않았음도 미루어 알 수 있는 일이다.
    우선은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무예를 배우는 일이 방해되지 않을까 염려를 해서요, 둘째는 상대편과 세교가 있어 서로 친형제처럼 지내야 할 처지라는 것을 알고 사정을 보다가 이길 수 있는데도 이기지 못하고, 패하지 않을 텐데 혹시 패하지나 않을까 염려를 했기 때문이다. 곽정은 더 물어 볼 수도 없어 잠자코 있었다.

    [자, 우리 목역 부녀를 보러 가자. 그 소녀 성격이 강인해 다른 일이나 벌어지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곽정도 걱정이 되던 일이다. 둘은 서성대가의 고승 여관으로 왔다. 여관 안으로 들어서는데 10여 명의 비단옷을 입은 수종들이 나오는 것과 맞부딪쳤다. 왕처일을 보고 고개 숙여 절을 한다.

    [소인배는 왕자님의 명을 받고 도장님과 곽나리를 모시러 왔습니다.]

    말을 하면서 빨간색 청첩장을 바친다. 왕처일의 초청장에는 제자 완안강배(弟子 完顔康拜)라고 씌어 있고 곽정의 것에는 교제(敎弟)라고만 되어 있다. 왕처일이 초청장을 받아 들었다.

    [좀 있다 가마.]

    그 중에 우두머리인 듯한 하인이 다시 입을 연다.

    [여기 가져온 과자와 과일은 저의 왕자께서 도장님과 곽정 나리께 드리는 것이온데 두 분께서 어디 머무르시는지 제가 갖다 놓겠습니다.]

    12개의 그릇에 과일과 과자가 가득 담겨 있다. 모두가 진품뿐이다. 곽정은 황용이 좋아할 것을 생각하며 기쁜 표정을 짓는다. 왕처일은 완안강의 위인이 못마땅하여 거절하려다 곽정의 표정을 살피고 웃고는 받는다.

     <제 1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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