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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十八 章. 향기로운 편지
옥양자 왕처일은 완안강이 보낸 과자 등을 받고 목역이 거처하고 있는 여관을 물어 확인한 뒤 안으로 들어섰다. 목역은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침대 위에 누워 있고, 그의 딸은 침대곁에 걸터앉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다가 왕처일과 곽정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왕처일이 목역의 두 손의 상처를 보니 손등에 다섯 손가락 자국이 깊이 팬 것이 뼈가 다 들여다보일 지경이다. 마치 병기에 부상당한 것처럼 퉁퉁 부어 올랐다. 금창약(金創藥)만 발랐지 곪을까 봐 매지는 않았다. 왕처일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완안강의 무술이나 솜씨로 보아 틀림없이 구사형(丘師兄)에게 배운 것인데 그래 우리 전진파 가운데 어디 이렇게 악랄하고 무서운 수법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틀림없이 무슨 곡절이 있을게야.)
고개를 들려 소녀를 건너다보며 입을 연다.
[색시의 이름이 어떻게 되오?]
[저는 목염자(穆念慈)라고 해요.]
[아버님 상처가 가볍지 않으니 잘 치료해 드려야 하오.]
품에서 두어 냥의 은자를 꺼내 책상 위에 을려 놓는다.
[내일 다시 오리다.]
목역과 목염자가 고맙다는 인사도 할 새 없이 곽정의 손을 잡고 여관을 나서니 비단옷을 입은 수명의 수종들이 나서며 인사를 올린다.
[저희들 왕자께서 기다리고 계시오니 도사님과 곽나리께서 함께 가 주십시오.]
왕처일이 고개를 끄덕인다.
[도사님,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곽정이 말을 마치고 여관으로 달려가 완안강이 보내온 과자 상자를 열고 네댓 개를 골라 손수건에 싸서 품안에 쑤셔 넣고 달려 나왔다. 네 명의 수종과 왕처일의 뒤를 따라 함께 왕부로 왔다. 조왕부의 대문에 당도하니 두개의 깃대가 하늘을 찌를 듯 구름위로 솟아 있고 옥돌을 쪼아 만든 사납게 생긴 돌사자가 빨간 대문의 양옆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 백옥으로 다듬어진 계단이 저끝까지 가지런하다. 대문 가운데에 조왕부(趙工府)란 세 개의 금글자가 뚜렷하다.
조왕(趙王)이라면 바로 대금국의 육대자인 완안열이다. 곽정은 자기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떤다.
(설마, 이 왕자라는 사람이 완안열의 아들은 아닐 테지? 완안열은 내 얼굴을 아는데 여기서 만나게 된다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막 생각에 잠겼는데 풍악 소리가 울리며 머리엔 금관을, 몸엔 홍포를 입은 완안강이 옥대를 번쩍이며 나와 반긴다. 왕처일은 그의 호화로운 차림이 못마땅한지 가볍게 미간을 찌푸릴 뿐 아무 말 없이 그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간다. 완안강은 왕처일을 상좌에 앉힌다.
[도사님과 곽형이 이렁게 왕림해 주시니 삼생의 영광이옵니다.]
왕처일은 그가 무릎을 꿇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이마를 조아리는 것도 아니며, 또 자기를 보고 사숙(帥叔)이다고 부르지도 않는 태도에 슬그머니 화가 치밀었다.
[그래 자넨, 사부님께 몇 해나 무예를 익혔는가?]
[저 같은 게 무슨 무예를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부님께 이 년 동안 배웠을 뿐입니다. 세 발 가진 고양이 같은 서툰 재주를 너무 놀리지 마십시오.]
[전진파의 무공이 비록 훌륭하달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세 발 가진 고양이 같은 그런 서투른 재주는 아닐세. 자네 사부께서 일간 여기로 오실텐데 알고 있는가?]
[제 사부께선 지금 여기 계십니다. 만나시렵니까?]
왕처일은 깜짝 놀란다.
[아니 어디에?]
완안강이 가볍게 손바닥을 두 번 두드리고 수종에게 이른다.
[상을 차려라!]
뭇 수종들이 차례로 전갈을 한다. 완안강이 왕처일, 곽정 두 손님을 모시고 안으로 안내를 한다. 회랑을 돌고 돌아 한참이나 걸었다. 곽정이 어디서 이렇게 으리으리한 광경을 본 적이 있었던가! 눈이 어지러울 지경으로 호화찬란한 광경에 그만 입이 벌어진다. 게다가 만일 완안열을 만나게 되면 어떻게 할까 걱정이 되어 조바심만 더해진다. 화청(花廳)에 당도하니 그곳엔 6,7명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은 이마에 혹이 세 개나 불끈 솟아 있는 것이 바로 삼두교 후통해가 아닌가? 곽정을 보더니 눈알을 뒤집고 쏘아 본다.
곽정이 가볍게 놀라기는 했지만 왕처일이 옆에 있는데 전들 어쩌랴 싶어 마음을 놓는다. 완안강이 만면에 웃음을 띄고 왕처일을 향해 말문을 연다.
[도사님, 여기 계신 분들이 오래 전부터 도사님의 위명을 흠모하며 뵙고 싶어했습니다. 여기 이 분이 팽채주, 두 분께서는 벌써 만나셨지요.]
둘은 서로 예를 표했다. 완안강이 다시 홍안의 백발 노인을 가리킨다.
[이분은 장백산 삼선인 양자옹 노인이십니다.]
(아니, 이 노괴가 어찌 또 여기에 나타났을까?)
왕처일이 놀라는데 양자옹이 먼저 인사를 한다.
[철각선 왕진인을 뵙게 되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이번 나들이가 헛되지 않군요. 여기 이분은 서장밀종의 대수인 영지상인이올시다. 우리 하나는 동북에서, 또 하나는 서남에서 만 리를 멀다않고 왔는데 이거 참 무슨 인연이 있는가 봅니다.]
이 삼선노괴 양자옹은 아주 달변이다. 왕처일이 영지상인을 향해 고개를 숙이니 그 장승은 두 손으로 합장을 한다. 이때 걸찍하게 목쉰 소리가 울렸다.
[이제 보니 강남 칠괴를 믿고 그렇게 방자하게 까불고 다녔구만.]
왕처일이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번쩍이는 대머리에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이제라도 툭 불거져 나을 것 같은 험상궂은 인상이다.
[아, 혹시 귀문용왕이신 사(沙)선배가 아니신지?]
[그렇소, 전부터 날 알고는 있었구먼.]
벌컥 화를 낸다. 왕처일은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우리 강물이 우물물을 긴드릴 수 있나? 뭐 잘못한 일도 없을 텐데?)
온화한 낯빛으로 부드럽게 대했다.
[사선배님의 존함을 늘 존경해 왔습니다.]
그 귀문용왕의 이름은 사통천(沙通天)이다. 무공은 사제(師弟)인 후통해와 비할 처지가 아니다. 후통해보다 수십 배 홀륭하다. 다만 그의 성질이 난폭하여 무예를 전수할 때도 늘 성질만 사납게 부린다. 그래서 일신에 지니고 있는 그 훌륭한 무공도 네 명의 제자가 겨우 열에 두서넛 배웠을까 말까 한 처지다. 황하사귀가 몽고의 일전에서 곽정에게 패하고 말았다는 소식을 듣고 사통천은 몹시 성질을 부리고 닥치는 대로 그 넷을 두들겨 패 호통을 치고 사제인 삼두교 후통해에게 명령을 내려 곽정을 잡아 오도록 했지만 웬걸, 황용의 놀림감만 되고 말았다.
그는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져 체면이고 뭐고 살필 겨를도 없이 손을 뻗어 곽정의 멱살을 집으려고 대들었다. 곽정이 뒤로 한 발 물러서자 왕처일이 도포의 소맷자락으로 그 사이를 막았다.
[아니, 정말 저 개만도 못한 녀석을 감싸고 돌겠소?]
벌컥 화를 내며 장풍으로 왕처일의 가슴을 향해 쉭 하고 친다. 왕처일은 공격의 흉악함을 느끼며 자기도 장풍을 날린다. 서로와 손바닥이 마구치는 순간 옆에서 한 사람이 쏜살같이 나서서 왼손으론 사통천의 팔목을 잡고, 오른손으론 왕처일의 팔목을 잡아 가볍게 밖으로 떼 놓았다. 왕처일과 사통천은 들 다 당세 무림에선 가장 유명한 인물들이다. 그들 둘의 장풍이야말로 평생의 절학(絶學)이다. 상대가 상대니만큼 조금이라도 소홀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전광석화와 같이 순간에 나타나 이렇게 가볍게 이 두 고수를 떼 놓을 수 있다니 놀라운 솜씨다. 왕처일도 깜작 놀라 믈러서고 사통천의 분통도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이렇게 대단한 인물이 도내체 누구란 말인가? 둘은 서로 그를 바라다보았다. 하얀 옷에 가벼운 가죽외투, 잘생긴 얼굴에 나이는 35,6세, 두 눈썹이 길고 준수한 풍채가 수재나 재상과 같고 몸에 걸친 복식이 또한 부귀한 왕손 같다. 완안강이 웃으며 소개한다.
[이분은 서성곤룬(西城崑崙) 백타산(白駝山) 산주인 구양공자(歐陽公子)이십니다. 중원(中原)에 와 본 적이 없으시니 여러분께서도 초면일 겁니다.]
아닌 밤둥에 흥두깨격으로 나타난 인물이다. 왕처일과 곽정만 처음 보는 게 아니라 팽련호, 양자옹까지도 서로 모르는 처지다. 여러 사람들이 그의 무공을 보고 마음속으로 흠모했지만 백타산이란 이름은 금시 초문이다. 여기 모인 사람들이 모두 산전수전 다 겪은 무림의 명수들이라 그들은 각각 생각해 보았지만 이 사람의 이름을 들어 본 기억은 없었다.
그 구양공자가 공손하게 손을 마주 잡고 말문을 열었다.
[제가 벌써 연경(燕京)에 도착했어야 할 텐네 오는 도중 다른 일이 생겨 며칠 지체되었습니다. 널리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곽정은 완안강이 그를 백타산 산주라고 소개하는 말을 듣자 노상에서 자기 말을 뺏으려고 대들었던 흰옷의 여자들이 생각났다.
(혹시, 이 사람이 내 여섯 분 사부님들과 싸운 것은 아닐까?)
엉뚱한 생각까지 든다.
왕처일은 상대방 하나 하나가 모두 쟁쟁한 고수들임을 알자 적이 놀람을 금할 수 없었다. 만일 여기서 싸움이라도 벌어진다면 큰일이다. 1대1로 한대도 승패를 예측할 수 없을텐데, 그들이 한꺼번에 공격을 한다면 어떻게 상대를 한단 말인가? 즉시 완안강을 향해 묻는다.
[자네 사부는 어디 계신가? 어째서 여기로 모시지 않지?]
[네, 알겠습니다.]
고개를 돌려 한 수종에게 이른다.
[사부님을 모셔 오너라!]
수종이 대답을 하고 물러나자 왕처일은 안도의 숨을 내쉰다.
(구사형이 여기 계신다니, 혹시 무슨 일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이젠 당해 낼 수 있겠지!)
잠시 후 신발 끄는 소리와 함께 몸집이 뚱뚱하고 비단 옷을 입은 무관이 문 밖에 나타났다. 아래턱에 수염이 텁수룩한 40여 세 정도의 인물로 무인다운 풍채를 하고 있었다. 완안강이 그의 앞으로 다가서며 사부라고 불렀다.
[이 도사께서 사부님을 뵘고 싶다고 벌씨 몇 차례나 물으셨습니다.]
왕처일은 어이가 없었다. 화가 불끈 치밀어 올랐다. 완안강을 항해 벌컥 소리를 질렸다.
[아주 건방진 녀석이로구나, 그래 날 놀릴 셈이냐?]
그러자 그 무관이 나선다.
[도사님, 그래 내게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 내 평소 도사니, 스님이니 하는 것 별로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데.]
왕처일도 어이없어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렇소. 내 나으리께 시주 좀 하라고 왔소. 천 냥만 시주하구료.]
그 무관은 탕조덕(湯祖德)이라 하는 사람인데 조왕 완안열 수하의 친병대장이다. 완안강이 어렸을 때 무예를 가르친 일이 있었다. 그래서 조왕부 안에선 모두 그를 사부라고 부른다. 이제 왕처일이 내뱉듯 천 냥이나 시주하라는 말을 듣고 놀라 책망올 하려고 하는데 완안강이 먼저 도사의 말을 받았다.
[그야 물론 시주를 해야지요.]
수종을 향해 분부를 내린다.
[여봐라, 빨리 나가 천 냥을 준비했다가 도사님 가실 때 드리도록 해라.]
탕조덕이 이 말을 듣고 벌린 입을 다물 생각도 않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발끝에서 머리 위까지 왕처일을 훑어본다.
[자 이제들 자리에 앉으십시다. 도사께선 처음이시니 이 상석에 앉으세요.]
완안강이 권하자 왕처일은 몇 번 사양하다가 그대로 앉았다. 술이 서너 순배 돌아간 후 왕처일은 서서히 얘기를 꺼내 놓는다.
[오늘 무림의 선배들이 이렇게 다 한자리에 모이셨으니 한번 생각들 해 보시지요. 목가 성을 가진 부녀의 일은 어떻게 하는게 좋을 것 같습니까?]
어떻게 대답이 나오는가 궁금하여 뭇 사람들의 시선이 완안강의 얼굴에 쏠린다. 완안강이 잔에 술을 따라 몸을 일으켜 세우며 두 손으로 받쳐 왕처일에게 권한다.
[우선 이 술이나 받으십시오. 그 일은 도사님이 시키시는 대로 따라 하겠습니다.]
왕처일은 이렇게 시원한 대답이 나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 쪽에서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래서 손에 든 잔을 쭉 비웠다.
[좋소! 그럼 그 목씨를 이리로 모셔다가 얘기를 합시다.]
[마땅히 그래야지요. 수고스러우시지만 곽형이 가서 모셔 오도록 함이 어떠하올지?]
완안강의 말에 왕처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곽정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왕부를 나왔다. 고승 여관에 도착하여 목역이 묵고 있있던 방으로 들어서니 목역 부녀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옷보따리 등도 보이지 않아 심부름꾼에게 물어 보니 방금 어떤 사람이 나타나 데리고 나갔는데 방값, 밥값을 치르고 갔으니 오지 않을 것이라는 말까지 들러준다. 곽정은 누가 와서 데리고 나갔느냐고 물었지만 심부름꾼의 얘기만으론 종잡을 수가 없다. 걸음을 재촉하여 조왕부로 돌아오니 완안강이 내려와 반긴다.
[곽형, 주고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목선생은?]
곽정이 경위를 설명했다. 완안강이 한숨을 내쉰다.
[그렇게 되면 내가 큰실례를 하게 되는데...., 이봐라. 여러 사람이 나가 사방으로 수소문해서 그분을 찾아 모셔오도록 하거라.]
수종들이 대답을 하고 몰러나갔지만 왕처일은 아무래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누가 무슨 장난을 치는지는 몰라도 세월이 가면 다 드러날 테지.]
[도사님 말씀이 맞습니다.]
왕처일의 빙소 섞인 말에 완안강도 맞장구를 친다. 그 탕조덕이란 자는 도사가 못마땅해 견딜 수가 없었다. 말 한마디에 은자 천 냥을 뺏겼을 뿐만 아니라 왕자를 대하는 태도에도 예의라고는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 도사께서 어느 도문에 속하신 분인 줄은 몰라도 뭘 믿고 여기 와서 큰소리만 치시는 게요?]
[이 장군은 어느 나라 사람인데 무얼 믿고 여기 와서 관리를 지내는 게요?]
왕처일은 그가 틀림없는 한나라 사람인데 금나라에 와서 관리를 지내는 것 같아 조롱을 한 것이다. 탕조덕은 누가 자기를 보고 한나라 사람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을 제일 싫어한다. 자신은 무예도 훌륭하고 또 금나라 일이라면 충성을 다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군대를 통솔하여 업적을 남길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 원통했었다. 관직이 낮은 편은 아니라 하지만, 20여 년 애쓴 보람이 있어 여전히 조왕부 안에서 한직에만 눌러 앉아 지내고 있었다. 왕처일의 말은 그대로 그의 아픈 곳을 찌르고 말았다. 금방 낯빛이 새파랗게 질려 불끈 소리를 지르며 일어나 양자옹과 구양공자를 가운데 둔 채 주먹으로 왕처일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장군께서 먼저 그런 얘기를 꺼내시곤 왜 또 손찌검까지 하려고 하오?]
웃으며 손을 뻗어 젓가락으로 그의 팔뚝을 집었다. 그러자 탕조덕의 주먹이 허공에서 멎는다. 몇 번이나 힘을 줘 보았지만 요지부동이다. 놀랍기도 하고 분통도 터진다.
[아니, 이놈의 도사가 요술을 부려!]
있는 힘을 다해 손을 움츠리려 해도 여전 그 모양이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어찌할 바를 모른다. 양자옹이 그의 옆에 앉아 있다가 웃는다.
[장군, 화내지 마시고 앉아 술이나 드십시다.]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눌러 앉힌다. 왕처일은 젓가락의 힘만 가지고도 탕조덕쯤의 팔목을 잡고있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양자옹이 탕조덕을 눌러 앉히는 그 힘을 이겨 내기에는 부족했다. 젓가락을 놓으며 그릇에 있는 닭다리를 집어 얼른 탕조덕의 입에 쑤셔 넣었다. 탕조덕은 막 입을 벌려 욕을 하려다가 닭다리를 가득 입에 문 채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분하고 부끄러워 일어나 내실로 달아났다. 이 꼴을 보고 웃지 않을 수 없어 폭소가 한바탕 장내에 터졌다.
잠시 후 사통천이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전진교야말로 남북에 그 명성을 날리고 있는데 과연 헛소문이 아닌 줄 믿고 있소. 그런데 도사께 한 가지 여쭈어 봅시다.]
[네, 무슨 말씀이든지 해 보세요]
[내가 전진파와는 아무 원한도 없는 처지인데 도사는 어째서 강남 칠괴를 도와 내 입장을 난처하게 하십니까? 전진파는 사람도 많고 나는 별 재주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무서워하는 건 아니오.]
[사선배님, 그건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오해를 하고 계시군요. 저도 강남 칠괴의 이름은 들어 알고 있지만 한 번도 만나 본 일은 없습니다. 제 사형(師兄) 한 분이 그들과 좀 알고 있는 모양이지만 무슨 강남 칠괴를 도와 선배님을 난처하게 한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좋소, 저 어린 녀석을 내게 넘겨 주시오.]
벌떡 일어나 곽정에게 다가가 멱살을 잡으려고 했다. 왕처일은 곽정이 피하지 못할 것을 알았다. 만약 잡히기만 하면 크게 부상을 입을 것은 당연하다. 먼저 대들어 왼쪽 어깨로 곽정을 슬쩍 밀자 그대로 의자에서 몸이 떴다. 우지직 소리를 내며 의자가 부러져 나갔다. 사통천이 의자를 틀어 잡은 것이다. 그의 외문(外門)의 내공이 벌써 극치의 경지에 도달해 있음을 알 수 있는 솜씨다. 비록 그것이 혹풍쌍쇄의 구음백골조처럼 악랄하고 무서운 것은 아니지만 무림에서 보기 드문 놀라운 재주다. 사통천은 왕처일의 방해에 분통이 터지고 말았다.
[그래도 저 녀석을 두둔하고 감쌀 셈이오?]
[아닙니다. 이 아이는 제가 왕부로 데리고 들어왔으니 잘 데리고 나가야 합니다. 사선배께서 오늘은 참으시고 다음에 화풀이 하심이 어떠 하올지?]
그러자 구양공자가 나섰다.
[이 소년이 사형께 무슨 죄를 지었는지 어디 말씀을 해 보시죠. 우리 함께 들어 봅시다.]
사통천은 생각했다. 보아하니 구양공자의 무공이 결코 자기만 못해 보이지 않는다. 우리 형제 둘이 이까짓 어린 녀석쯤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도움을 청하는 것이 상책일 것 같았다. 자리로 돌아와 다시 술 한 잔을 비웠다.
[말을 하자면, 나도 이 녀석과 무슨 원한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내게 못난 제자가 네뎃 있는데 조왕부를 마라 몽고에 들어가 무슨 일을 하려다가 이제 막 성공을 하러는 순간 저 녀석이 방해하는 바람에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 일 때문에 조왕부에 대한 면목을 잃고 말았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이까짓 어린 녀식 하나를 어떻게 해치우지 못하고서야 무슨 큰 일을 해 낼 수 있겠습니까?]
좌중에서 왕처일과 곽정을 제외하고는 모두 조왕부에서 비싼 이물로 초빙해 온 사람들이다. 완안강은 바로 조왕의 세자다. 사통천의 말을 돋고는 모두 그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 곽정을 잡아 조왕에게 넘겨 처리케 하러는 눈치들이다. 왕처일은 좌중의 시선이 곽정에게 쏠리는 것을 보고 초조해졌다. 어떻게 해서라도 몸을 빼야 한다. 그러나 이 강적들 앞에서 무슨 수를 써야 할지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무예를 익히고 하산한 이래 얼마나 많은 싸움을 보고 겪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이 많은 강적과 겨룰 방법은 없었다. 지금 와서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다만 이 순간을 질질 끌면서 각자의 허실이나 살펴볼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여러분의 명성은 오래 전부터 흠모해 왔습니다. 오늘 인연이 있어 이렇게 뵙게 되니 얼마나 기쁜지 형언할 수 없습니다.]
말을 멈추고 곽정을 가리킨다.
[이 소년이 하늘 높고 땅 넓은 줄 모르고 조왕께 득죄를 한 것은 사실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소년을 머무르게 하려고 하시는데 저 혼자 반대할 수 없는 입장임을 너무나 잘 압니다. 다만 외람된 요구이오나 여러분의 재주가 어느 정도인지 보여 이 소년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싶은 마음 간질합니다. 제가 힘을 쓰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 소년을 도울 마음은 간절하오나 능력이 없어서 그럽니다.]
삼두교 후통해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한쪽에 앉아 있다가 왕처일의 말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긴 옷을 어루만지며 나섰다.
[그럼 제가 먼지 도사와 겨루어 보겠소.]
[저 같은 둔한 재주로 어찌 감히 여러분과 겨룰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후형께서 절기(絶技)를 보여 주심으로 해서 저도 좀 배우고 또 이 소년에게 본때를 보여 줌으로 해서 하늘 높은 줄도 알고 사람 위에 사람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하여 다시는 망동함이 없도록 해 주십시오.]
후통해는 왕처일의 언중유골의 말을 들으면서 화는 나지만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믓거린다. 사통천은 아무래도 전진파의 도사들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호동해를 건너다보며 말을 이었다.
[여보 사제. 설리매인(雪裏埋人)의 재주를 왕진인에게 보여 드리고 가르침을 받구료.]
이때도 눈은 멈추지 않고 계속 내리고 있었다. 후통해는 마당으로 내러가 양 팔을 허위적거리며 눈을 쓸어 모아 3자(尺) 정도의 눈무더기를 쌓아 을렸다. 그리고 나서 다시 발로 다져 놓고는 뒤로 서너 발짝 물러섰다가 몸을 날러 머리는 땅으로, 발은 하늘을 향한 자세로 푹 하는 소리와 함께 눈무더기 속으로 처박는다. 흰 눈이 그대도 가슴 높이밖에 차지 않는다. 곽정은 그게 무슨 재주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다만 그가 머리를 눈 속에 거꾸로 박은 채 꼼짝하지 않는 것만이 이상스러울 뿐이다. 사통천이 완안강의 수종들을 향해 부탁을 한다.
[여러분께서 귀찮으시겠지만 저 후형 머리 부분에 있는 눈을 단단하게 다져 주시오.]
뭇 수종들이 재미있다는 듯 시시덕거리며 대들어 사방의 눈을 꼭꼭 다졌다. 원래 이 사통천과 후통해는 황하에서 그 명성을 떨치고 있었기 때문에 수상(水上)의 무공은 훌륭했다. 물의 성질을 잘 알고 있어서 물 속에 잠수를 하면서도 숨을 쉬지 않고 견디는 재주가 남달리 뒤어난 데가 있었다. 그래서 후통해는 눈 속에 머리를 박고도 호흡을 멈춘 채 버티고 있어도 괜찮은 것이다. 여러 사람들은 술을 마시며 칭찬을 하다가 오랜만에 후통해가 손을 뻗고 머리를 눈 속에서 빼는 것을 보고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곽정도 소년이라 박수를 치면서 덩달아 좋아했다. 후통해는 자리로 들아와 술을 마시면서도 계속 곽정을 노려본다.
[제 사제의 재주가 별 것 아니다 공연한 웃음거리만 되고 말았습니다 그려.]
사통천은 이렇게 말하면서 손을 뻗어 접시 위에 있는 호박씨를 주워 들고 가운데 손가락으로 퉁긴다. 호박씨는 선을 그리며 튀어 나간다. 호박씨 하나 하나가 화청 앞에 있는 흰 벽에 가 꽂힌다. 순식간에 벽 위에 요(耀)자가 새겨진다. 그 벽은 좌석에서 서너 장 거리나 떨어져 있었다. 호박씨는 가볍고도 연한 것인데 어떻게 저렇게 날아가 박힐 수 있단 말인가? 정말 놀라운 솜씨다. 왕처일은 생각했다.
(귀문용왕이 황하를 독점할 수 있었던 것도 다 이런 비범한 재주가 있었기 때문이로구나! 정말 보통일이 아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벽에는 또 무(武)자가 생겼다. 다음엔 양(揚)자, 보아하니 요무양위(耀武揚威)라는 네 글자를 새길 모양이다. 팽련호는 이를 보면서 몸이 근질근질한 눈치다.
[사형, 사형의 귀신 같은 재주엔 정말 탄복했습니다. 우리 다같이 동업을 합시다그려. 이 도사께서 우리 재주를 끝까지 시험해 보실 눈치니 사형 덕에 어디 나도 체면이나 세웁시다.]
몸을 번쩍 날러 벌써 문쪽에 나가 섰다. 이때 사통천은 마지막 남은 위(威)자를 반이상 새겨 놓고 있었다. 팽련호는 두 손을 오므렸다 펐다 오므렸다 하면서 사통천이 쏜 호박씨를 허공에서 받아 버렸다. 호박씨는 작고 속도도 빨랐는데 한 개도 흘리지 않고 모두 받아 버린 것이다. 그는 받아든 호박씨를 입 안에 털어 넣는다. 곽 깨무는가 하는 순간 벌써 빈 껍질을 뱉아 놓았다. 한 사람은 계속해서 퉁기고 한 사람은 계속 받아 먹고 뱉아 낸다. 어찌나 빠르게 뱉는지 꼭 물 떨어지는 것과 흡사했다. 여러 사람의 환호성 가운데 팽련호가 웃으며 말을 꺼낸다.
[아이구, 난 이제 더 못 먹겠어요.]
펄쩍 뛰어 제자리로 돌아오고 사통천은 남은 위(威)자를 마저 새겨 놓았다. 만일 다른 사람이 중간에 나섰더라면 가만 보고 있을 사통천이 아니었지만 그들 둘은 벌써 2,30년 사귄 우정이라 그냥 웃고 넘긴 것이다. 사통천이 고개를 돌러 구양공자를 건너다본다.
[어디 이번엔 구양공자께서 희한한 재주를 좀 구경시켜 주십시오.]
구양공자는 그의 말투에서 어딘가 가시 돋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이때 시중드는 사람이 달콤한 음식을 바꾸어 놓으며 젓가락도 새것으로 갈아 놓았다. 양념한 음식을 먹던 젓가락을 치우는 것이다. 구양공자는 거둔 젓가락을 받아 쥐고 휙 하니 밖으로 뿌린다. 20개의 젓가락이 일시에 눈 속에 꽂힌다. 그런데 그냥 꽂히는 게 아니라 얌전한 네 송이의 매화를 그린 것이다. 젓가락쯤 눈 속에 꽂는 일이야 어린애들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한꺼번에 20개를 뿌려 이런 도형을 만든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이러한 솜씨는 정말 오묘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곽정이나 완안강은 이해하기 어려울 테지만 왕처일이나 사통천 등이 사믓 마음속으로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왕처일은 계속해서 자리를 피할 궁리만 하고 있었다.
(무림 가운데의 고수라면 평소 단 한 사람을 만나 보기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닌데 어째서 이렇게 다들 이곳에 모이게 됐을까? 백타산 산주라든가 영지상인, 삼선노괴 등은 이 중원에 잘 나타나는 인물들이 아닌데 어째서 이 연경에 함께 와 모였을까? 여긴 분명 어떤 곡절이나 음모가 있는 것이다.)
이 궁리 저 궁리 몰두하고 있을 때 삼선노괴 양자옹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화청 앞에 놓인 돌북(石鼓) 옆으로 다가선다. 허리를 가볍게 숙인 채 오른손을 석고의 허리에 턱 얹고 번쩍 집어 던진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손에 마치 끈끈이가 묻어 있는 것처럼 7,80근이나 되는 무겁고도 미끈미끈한 석고를 살짝 손에 붙여 허공으로 두어 장 높이로 집어 던지니 말이다. 그는 석고가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몸을 바람처럼 날리며 양 손을 움직여 또다른 두 개의 석고를 먼저와 같이 공중으로 집어 던졌다.
이때 맨 먼저 던졌던 석고가 떨어져 내여왔다. 그가 재빨리 대들어 이마로 석고를 반으니 석고가 이마 위에서 빙글빙글 돌아간다. 여러 사람들의 갈채와 환호성 속에 두번째 석고가 맨 먼저의 석고 위에 내려앉아 돌고 다시 세번째의 석고도 내려와 돈다. 그는 세 개의 석고를 이마에 인 채 여러 사람을 향해 두 손을 모아 인사를 하고 서서히 걸음을 옮겨 마당으로 내려가 풀쩍 뛰며 왼발을 더듬어 구양공자가 눈 속에 꽂아 둔 젓가락 위에 올라타고 회중포월(懷中抱月)이며 납궁식(拉弓式) 등 연청귄(燕靑拳)의 묘기를 보이기 시작했다. 머리 위엔 200여 근이 넘는 세 개의 석고를 이고도 발길을 사뿐사뿐 옮겨 뾰족한 젓가락 위만 밟고 움직이는 것이다. 물론 은으로 된 젓가락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가늘고 약한 물건임엔 틀림없는데도 기울어지거나 구부러지지도 않고 서 있는 것이 더욱 놀라운 일이다.
이 연청권 일로를 다 보여 주었는데도 쓰러진 젓가락 하나 찾아볼 수 없다. 정말 묘기백출이요,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양자옹의 얼굴에선 웃음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머리를 갸우뚱, 세 개의 석고를 동시에 내려 놓고 자기 자리를 찾아 앉는다. 왕처일은 강호를 두루 돌아다니며 거리에서 마술을 하는 사람들이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돌리는 것을 수없이 보아 왔지만 양자옹과 같은 이런 재주는 본 일이 없었다. 이것으로 보아 그의 경신 무공이 어떠하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곽정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이 희한한 재주에 혀만 찰 뿐이다.
이제 주석(酒席)도 거의 끝나는 판이라 심부름꾼들이 금으로 된 대야에 따뜻한 물을 가져다 손님들의 손을 씻게 했다. 왕처일은 마음속으로 또 생각해 본다.
(영지상인만 아직 재주를 보여 주지 않고 있는데 그가 재주를 보이면 함께 대들어 곽정에게 손을 쓰겠지.)
비스듬히 그 장승을 건너다보니 아무 일도 없다는듯 손만 씻고 있었다. 다들 손을 씻은 지 오랜데 그는 아직도 내야에 두 손을 담그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태연자약한 태도에 의아한 생각을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왕처일과 구양공자는 그가 손을 담고 있는 대야에서 한 가닥 김이 피어오르고 있음을 보았다. 시간이 지나자 대야 속에선 김이 모락모락 솟아나다가 마침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왕처일은 정말 놀랐다.
(내공을 이용하여 체내의 열기로 대야의 물을 끓이다니, 더 기다리다가는 큰일나고 말겠구나. 무슨 수를 써야 한다.)
왕처일은 다급해졌다. 시간이 지나면 큰일이다 싶어 몸을 비스듬히 기울이고 왼손을 써서 완안강의 맥문(脈P玗)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여러 사람들이 깜짝 놀라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을 때에는 왕처일이 벌써 완안강의 혈도를 찌르고 왼손을 그의 등에 얹어 놓고 있었다. 사통천 등 모두가 놉랍기도 하고 화도 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왕처일이 오른손에 술주전자를 들고 말을 꺼냈다.
[방금 여러분의 신기(神技)를 보고 정말 놀랐습니다. 자, 수고하신 여러분에게 술을 따라 올리겠습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세우지도 않고 주전자를 든 채 일일이 술을 따랐다. 술따르는 것쯤이야 예삿일이지만 저렇게 따르는 것은 처음 보는 일이다. 손만 추켜들면 주전자 입에서 술이 쏟아져 내려와 각자의 술잔에 차는 것이 아닌가? 그 술잔이 멀든 가깝든 똑같은 자세로 따르고 있는데도 공교롭게도 분수처럼 묘하게 술이 떨어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술잔은 바닥이 빈 채요, 반만 차있는 술잔도 있는데 많지도 적지도 않게 적당히 따르면서 한 방울도 넘치거나 흘리지도 않는다. 영지상인 등 모두가 그의 내공의 심오함을 알았다. 오른손으로 그렇게 술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왼손은 여전히 완안강의 등에 올려놓은 채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완안강의 폐나 내장은 부서지고 만다.
여러 사람들은 눈을 멀거니 뜬 채 속수 무책이다. 왕처일은 마지막으로 곽정과 자기의 잔에 술을 채우고 들이마신다.
[제가 여러분과는 아무 원한이 없습니다. 또 이 곽 소년은 제 제자도 아니오 친척도 아닙니다. 다만 그의 마음이 어질고 착함을 보았기 때문에 이러는 것입니다. 여러분께 간곡히 청하오니 제 체면을 보아 오늘만은 그냥 무사히 나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여러 사람들은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묵묵 부답이다.
[오늘 여러분께서 이 소년을 용서해 주신다면 저도 이 왕자를 풀어 주겠습니다. 하나는 금지옥엽 같은 왕자요, 하나는 평범한 백성이니 결코 여러분께서 손해를 보시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자 양자옹이 대답을 한다.
[왕도장께서 시원스럽게 말씀하시니 그냥 그렇게 합시다.]
왕처일은 아무 의심도 없이 팔꿈치로 완안강의 허리를 쳐 혈도를 풀고 자리에 앉게 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명색이 일종 일파(一宗一派)의 우두머리들이다. 마음이 아무리 악독하고 음흉하다 하더라도 기왕 약속을 한 이상 식언할 수 없는 체면들이다. 왕처일은 여러 사람들을 향해 일일이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곽정의 손을 잡았다.
[자, 이제 그만 작별하겠습니다. 후일 뵙겠습니다.]
독 안에 든 쥐를 그대로 내보내는 격이다. 분하고 원통하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완안강이 정신을 차리고 일어섰다.
[도사님, 기회 있으시면 또 찾아 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도 잘 지도해 주십시오.]
[흥, 무슨 면목으로 또 만난단 말이냐?]
왕처일과 곽정이 화청(花廳) 문어귀에 이르자 영지상인이 다시 입을 연다.
[도사의 공력은 정말 오묘하여 탄복했습니다.]
합장을 하여 인사를 하다가 돌연 쌍장을 뿌리니 맹렬한 바람이 왕처일을 향해 분다. 왕처일도 이것 큰일났구나 싶어 답례를 하면서 손바닥에 힘을 모은다. 수십 년 동안 익힌 내공으로 쌍장의 습격을 분쇄하러는 것이다. 두 줄기 강한 바람이 부딪치자 영지상인은 돌연 내력(內力)을 외공(外功)으로 바꾸며 오른손 바닥을 뻗어 왕처일의 팔뚝을 잡는다. 상대의 공격도 빨랐지만 왕처일의 변초(變招)도 신속하기 짝이 없다. 두 사람의 팔뚝이 순간적으로 엉켰다 떨어진다. 영지상인의 표정이 갑자기 변했다.
[놀랍습니다!]
펄쩍 뛰어 뒤로 물러선다. 왕처일도 가볍게 미소를 보낸다.
[대사는 강호에 명성이 자자한데 왜 약속을 어기십니까?]
영지상인도 노하여 소리를 지른다.
[내 저 곽가를 잡으려는 게 아니고 당신을 잡으려고....]
왕처일의 장력에 놀라 부상을 입었으면 잠시 쉬었다가 호흡이나 조절했더다면 발작하지 않았으련만 빈정거리는 말을 듣고 노기 충천했다가 그만 말도 채 끝맺지 못하고 입으로 피를 토한다. 왕처일은 더 머뭇거릴 수 없어 곽정의 손을 잡은 채 황급히 대문을 빠져 나왔다. 사통천, 팽련호 등 다른 사람들은 이미 약속을 한 바요, 또 영지상인이 피를 토하는 것을 보고는 섬찟하여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왕처일은 조왕부의 내문을 벗어나 모퉁이를 돌자 뒤를 살펴본 뒤 낮은 소리로 곽정을 향해 속삭이듯 말했다.
[너, 나를 업고 여관으로 가자.]
곽정은 그의 말소리에 아무 기력도 없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 얼굴이 창백한 것이 병색이 완연하지 않은가?
[도사님, 혹시 부상을 입으신 게 아닙니까?]
왕처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비틀비틀 몸을 가누지 못한다. 곽정이 무릎을 꿇어 왕처일을 들쳐업고 큰 여관을 찾아 문 안으로 들어서려고 했다.
[아냐...., 조용한...., 조용한 여관으로....]
등뒤의 왕처일이 신음하듯 중얼거리자 곽정도 눈치를 챘다. 만일 상대방에서 중상을 입은 것을 알고 찾아오는 날에는 끝장이 나는 것이다. 곽정도 서투른 길을 이리 찾고 저리 돌아 가까스로 여관 하나를 찾아 안으로 들어갔다. 등뒤의 왕처일의 호흡이 더욱 가빠지며 약해진다. 겨우 구들장 위에 그를 내려 놓았다.
[빨리...., 커다란 항아리를 찾아...., 물을 가득 채우게.... 맑은 물로....]
[또 무얼 준비할까요?]
왕처일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손을 휘저어 곽정을 재촉한다. 방에서 나온 곽정은 여관의 심부름꾼에게 두둑하게 돈꾸러미를 주면서 당부를 했다. 심부름꾼은 입을 함지박처럼 벌린 채 서둘러 준비를 했다.
[잘했구나. 얘야, 나를 안아서 항아리 속에 넣고 음...., 다른 사람 접근하지 못하도록....]
이유도 따져 물을 새 없이 곽정은 왕처일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히 했다. 왕처일은 눈을 감고 조용히 항아리 속에 앉아 있다. 가쁜 숨이 가라앉고 서서히 항아리 속의 물이 새까맣게 변해 버렸다. 동시에 그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날 좀 부축해 일으켜 다오. 그리고 맑은 물로 갈아 주렴.]
이렇게 일곱 번이나 항아리의 물을 갈자 이제 까만 물이 보이지 않았다. 상승의 내공으로 체내에 있던 독기를 세척해 낸 것이다.
[이제 괜찮다.]
왕처일이 웃으며 항아리를 짚고 빠져나오며 숨을 길게 내쉰다.
[그 장승의 무공이 독하기도 하구나!]
곽정도 안심이 되어 기뻤다.
[그 장승 손에 독이 있었나요?]
[그렇단다. 독사장(毒砂掌)이라는 것이다. 내 생전에 적지 않이 이 독사장을 보았다만, 원 이렇게 지독한 독사장은 처음인걸. 하마터면 죽을 뻔했구나.]
[무어 잡숫고 싶은 게 있. 으시면 말씀하세요. 제가 사 오겠습니다.]
왕처일은 벼루와 붓을 가져오게 하고 자기의 약처방을 써내려갔다.
[내 생명엔 아무 지장이 없지만 내장에 든 독기는 씻어 내지 못했다. 열 두 시간 내에 제거하지 않으면 잘못하다 평생 병신이 되느니라.]
곽정은 약 치방을 받아들고 나는 듯 밖으로 나섰다. 이 첩약은 빨리 먹을수록 좋은 것이다. 길 건너편에 약방이 보여 얼른 들어가 약처방을 내놓았다.
[손님, 처방의 혈갈(血竭)이니, 우칠(牛七)이니 하는 약은 없고 웅담도 마침 떨어졌군오. 미안합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른 집으로 달려가 보았지만 역시 마찬가지다. 예닐곱 집을 뒤져 보았지만 모두 허탕이다. 큰 집이고 작은 집이고 할 것 없이 성 안의 약방은 모조리 훑었지만 헛일이다. 원래는 많았는데 공교롭게도 방금 다른 사람이 와서 모조리 걷어 갔다는 것이다.
곽정은 그 말을 듣고야 짐작이 갔다. 원래 조왕부에서는 왕처일이 중독이 되어 이 약을 찾을 줄 알고 사람을 풀어 싹 쓸어가버린 것이다. 정말 악독하기 이를 데 없는 소행이다. 곽정은 기가 팍 죽어 머리를 파묻은 채 여관으로 돌아와 왕처일에게 경과를 아뢰었다. 이 말을 들은 왕처일은 탄식의 한숨을 내쉬고 곽정은 책상에 엎드러 훌쩍거리고 있었다.
[인명은 재천이니라. 살았다고 크게 기뻐할 일도 아니요, 죽는다고 슬퍼할 것도 없다. 낸들 죽지 않으란 법이 있겠느냐? 울지 말아라!]
곽정이 눈물을 거두고 멍하니 왕처일을 바라다본다. 왕처일은 하하하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일어나 앉아 무릎을 꿇고 내공을 쓰기 시작했다. 곽정은 조용히 일어나 여관 밖으로 나와 생각에 잠긴다.
(부근의 시골 마을에 가면 혹시 그 약을 살 수 있을지도 몰라.)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다시 기쁨이 샘솟는다. 사람을 찾아 지리를 물어야겠다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는데 여관집 심부름꾼이 달려와 봉투를 전한다.
<곽형 친전(郭兄親展)!> 글씨가 예쁘다. 편지를 받아드니 향기가 물씬 난다. 도대체 누가 내게 편지를 보냈을까? 궁금하여 봉투를 뜯는다.
<성 밖 서쪽으로 십 리에 있는 호수에서 기다리니 속히 오시오. 상의할 일이 있습니다.>
이름은 없고 히히 웃고 있는 황용의 초상화가 거기에 그러져 있었다.
[이 편지 누가 주더냐?]
[길 저쪽에서 누가 줬어요.]
곽정이 여관으로 다시 돌아오니 왕처일은 손과 발을 움직이며 운동을 하고 있었다.
[도사님, 제가 부근 시글 마을에 가서 약을 구해 보고 오겠어요.]
[우리가 그런 생각을 하면 그들도 다 생각이 있었셌지. 가 봐야 소용없다.]
그렇다고 곽정이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황용은 아무래도 나보다 영리하니 어디 한번 상의나 해 볼 일이다.
[친구가 기다리고 있으니 제가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말을 하면서 편지를 보인다. 왕처일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가 입을 연다.
[너 어떻게 그를 알게 됐느냐?]
곽정은 그를 만나게 된 경위를 들려주었다.
[삼두교 후통해를 놀리던 솜씨를 내 다 보았다. 그 아이의 몸놀림이 어딘가 이상한데가 있더라.]
정색을 하고주의를 시킨다.
[그러나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그 아이의 무공이 너보다 훨씬 위야. 이상한 점이 많던데 내 그 까닭을 알 수가 없구나!]
[절내로 저를 해칠 친구가 아니에요.]
[그런 게 아냐. 네가 인제부터 그를 알았느냐? 하여튼 조심해야 한다.]
곽정은 황용에 대하여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않는다.
(도사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황용이란 위인을 몰라서 하시는 거겠지.)
침이 마르게 황용을 칭찬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다.
[하여튼 가 보고 오너라.]
왕처일은 황용이 정파(正派)의 인물은 아니라고 단정을 내렸다.
第 十九 章. 왕부(王府) 안의 포석약
곽정은 더 말할 수 없는 형편이라 처방문을 품속에 넣고 걸음을 재촉하며 성 밖을 향해 달려나갔다. 성문을 벗어나니 함박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다. 앞을 내다보니 온천지가 은빛으로 하얗게 덮여 있고 사람의 발길은 끊긴 지 오래다. 10여 리를 달리니 과연 앞에 넓은 호수가 나타났다. 날씨는 별로 춥지 않아 호수는 얼어붙지 않았다. 하얀 눈송이가 수면에 떨어져 녹고 있었고 호숫가의 나무 위에는 설화가 만발해 있었다. 곽정이 사방을 두리번거려도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다.
(기다리다가 오지 않아서 먼저 돌아가 버렸나?)
[황용, 황용....]
큰 소리로 불러 보았지만 후루룩 두 마리의 물새만 놀라 날아가 버린다. 곽정은 실망이 앞서 다시 두어 번 황용을 불러 보았다.
(아직 오지 않았는지도 몰라. 여기서 기다려 봐야지!)
호숫가를 거닐며 설경만 구경하고 있었다. 밥 한 사발이나 먹었을까 하는 시간이 흘렸는데 간드러진 웃음 소리를 내며 일엽편주가 호숫가에 늘어진 나뭇가지 사이를 비집고 나타났다. 뱃머리엔 긴 머리가 치렁치렁 등을 덮은 한 소녀가 흰 옷을 입고 머리엔 금빛 띠를 두르고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곽정이 보니 나이는 15,6세, 선녀같은 자태가 비할 데 없이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소녀 였다.
곽정은 눈앞이 황흘하여 다시 더 바라다볼 용기가 나지 않아 고개를 돌려 그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소녀는 배를 호숫가에 대고 곽정을 부른다.
[곽정 오빠, 배에 오르세요.]
곽정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소녀는 얼굴에 봄바람 같은 미소를 머금고 손짓을 한다. 옷깃이 바람에 살랑 흔들린다. 곽정은 꿈인지 생시인지 몰다 눈을 비비고 다시 바라다본다.
[왜 그래요? 날 모르겠어요?]
소녀는 웃기만 했다. 곽정은 그 목소리를 듣고 황용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더럽고 남루한 남자 거지가 갑자기 선녀로 변할 수 있을까? 미심쩍어 자기 눈만 의심했다.
[내가 바로 황용이에요. 그래 그렇게 날 몰라봐요?]
곽정이 다시 눈을 비비고 살펴보니 과연 이목구비가 황용을 닮았다.
[아아니? 이게....]
[나는 원래 여자었어요. 빨리 배에 올라요.]
곽정은 어리벙벙한 채로 그가 시키는 대로 배에 올랐다. 황용은 배를 호심에 댄 후 술과 안주를 꺼내 놓는다.
[우리 여기서 술이나 들며 눈 구경을 해요.]
곽정은 이제야 좀 정신이 들었다.
[난 정말 멍청해, 남자인 줄 알았지 꿈에나 여자일 줄 생각이나 했나요? 이젠 이름도 함부로 부를 수 없겠군요.]
[그냥 용아(蓉兒)라고 불러요. 우리 아버지도 그렇게 부르시는 걸요.]
곽정은 품안에 지니고 있던 과자를 생각했다.
[여기 과자를 가지고 왔는데....]
완안강이 보냈던 과자를 품속에서 꺼냈다. 그런데 찌그러지고 부서져 말이 아니다. 곽정은 얼굴을 붉히고 황용은 그것을 보며 가벼운 미소를 띄었다.
[먹을 수가 없게 돼 버렸는걸.]
과자를 집어 호수에 던지려 하자 황용이 일른 뺏아 입에 넣는다.
[좋아요. 그냥 먹을래요.]
과자를 집어먹던 황용의 눈에서 갑자기 두 줄기 눈물이 좌르르 흘러 내린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엄마가 계시지 않아 그 누구도 날 이렇게까지 위해 준 일이 없었어요....]
하얀 손수건을 꺼낸다. 눈물을 닦으려나 했는데 일그러진 과자를 손수건에 곱게 싸 품안에 챙겨 넣는다.
[천천히 아껴 먹겠어요.]
곽정은 이런 황용의 태도에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하고 뭐 상의할 일이 있다고 했는데 무슨 일이지?]
[아니, 내가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리려고 했는데 그게 중요한 일이 아녜요?]
미소를 머금은 황용의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예뻤다.
[그렇게 예쁜 사람이 뭣 때문에 거지 행세를 했지?]
[그래, 내가 예뻐 보여요?]
황용은 고개를 살짝 돌린다.
[물론이지. 설산(雪山)에 서 있는 선녀 같은걸.]
[그래 선녀를 본 일이 있어요?]
[아니, 본 적이 있으면 이렇게 살아 있을 수 있나?]
[그건 또 왜요?]
[노인들한테 들었는데, 누구든지 선녀를 보기만 하면 집에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고 넋을 잃고 바다다보다가 죽는다던데.]
[그럼 큰일났군요. 나를 보았으니 이제 넋을 잃을 것 아녜요?]
배 위에서 술과 안주를 나누는 황용은 웃고 곽정은 얼굴을 붉힌다.
[우리야 친구니까 다를 테지!]
황용이 고개를 까딱거리고 정색한다.
[정말 내게 잘해 준다는 걸 잘 알아요. 내가 남자든 여자든 그게 무슨 상관예요. 내가 이렇게 고운 옷을 입고 나서면 누구든지 내게 친하게 굴 테지요. 내가 거지 노릇을 할 때 잘해 준 게 진심인 걸 분명히 아는데요.]
황용은 한없이 즐겁기만 했다.
[내가 노래를 부를 테니 들어 볼래요?]
[아냐 아냐, 노래는 다음날 듣기로 하고 우선 왕도사를 위해 약을 구해야 돼.]
즉시 조왕부에서 있었던 일이며 왕처일이 부상당한 일, 약을 구할 수 없었던 경위를 들러주었다.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이마에 땀을 흘리며 이 약방 저 약방 뛰어다니기에 무슨 일인가 했더니 바로 그 일 때문이었군요.]
곽정은 그제서야 황용이 자기 뒤를 밟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자기가 어느 여관에 들었는지를 알았겠지.
[내가 준 그 홍마를 빌어타고 약을 구하러 가고 싶은데....]
[그야 어렵지 않아요. 그 말은 내 말이 아니잖아요. 정말 내가 그 말을 달라고 했겠어요? 어쩌나 보려고 해서 그래 본 거예요. 그런데 부근을 다 뒤져도 약을 구할 수 없을 것 같군요.]
어쩌면 왕처일이 생각한 것과 똑같은 말을 할까? 곽정은 다시 초조해졌다. 그런데도 황용은 태연자약한 채 노래를 부르겠다는 고집이다.
[노래는 서서히 듣기로 하고 약 구할 방법을 생각해야지.]
[내 말을 들어요. 좀더 놀다가 가도 급할 것 없어요.]
[아냐, 열 두시간 안에 그 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치료할 수 없대.]
[글쎄, 내가 책임지고 약을 구하면 되잖아요. 아무 걱정 말고 이 술이나 들어요.]
곽정은 정말 어처구니 없었다. 하지만 서두른다 해서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요, 자기보다 수십 배 수백 배 총명한 황용의 말을 그대로 믿기로 했다. 황용은 어떻게 해서 황하사귀를 나무에 매단 얘기며 후통해의 분통을 터뜨렸는지를 그에게 들려주었다. 둘은 서로 허리를 잡고 웃었다. 어둠이 호수에 내리기 시작했다. 황용이 서서히 손을 뻠어 곽정의 손을 잡고 속삭인다.
[이젠 아무것도 무섭지 않아요.]
[어째서?]
[우리 아빠가 날 싫다고 해도 나를 버리진 않겠지요?]
[그야 물론이지, 나도 이렇게 즐거운 날은 없었는걸.]
황용이 곽정의 가슴에 자기 몸을 가볍게 묻었다. 곽정은 난초향기 같은 그윽한 향내가 피어오름을 느꼈다. 향기는 넓은 호면에 퍼져나가며 천지에 가득해지는 듯했다. 둘은 손에 손을 잡은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침묵이 오래오래 계속되었다. 황용이 한숨을 내쉰다.
[여기 정말 좋군오. 그런데 우린 떠나야 해요.]
[왜?]
[아니, 약을 구해다 왕도사를 구해야 하잖아요?]
[아 참, 그런데 어디 가 구한담?]
[약방에 있는 약들이 모두 어디로 갔지요?]
[틀림없이 조왕부 사람들이 거두어 갔을 거야.]
[그래요. 틀림없어요. 그리로 가요.]
곽정이 깜짝 놀랐다.
[조왕부로?]
[그래오.]
[안 돼. 갔다가는 우리 둘이 죽게 돼.]
[그럼 왕도사가 평생 병신이 되길 바란단 말이에요? 상처가 대단해서 자칫하면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몰라요.]
곽정은 자기도 모르는 용기가 솟아났다.
[좋아, 그럼 내 갈 테니 황용은 그만 둬.]
[왜요?]
[위험해!]
[정말 좋은 오빠예요. 날 끔찍이도 아껴 주시는군요. 괜찮아요. 위험한 일을 당한다면 그래 나 혼자 남아 살 수 있겠어요?]
곽정의 마음속에 형언할 수 없는 감격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용기 백배, 그따위 사통천이며 팽련호가 뭐 무섭단 말이냐? 천하에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다 해도 내 겁내지 않으리라.
[그래, 우리 둘이 갑시다!]
그들은 배를 언덕에 대고 일로 조왕부를 항해 달렸다. 둘은 조왕부의 담을 뛰어넘어 후원으로 들어갔다.
[곽정 오빠, 경신의 무공이 정말 놀랍군요.]
곽정은 담장 밑에 엎드린 채 원내의 동정을 살피고 있다가 자기를 칭찬하는 말을 듣자 마음이 흐뭇했다. 잠시 시간이 흐른 뒤 발자국 소리를 내며 두 사람이 이쪽을 향해 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왕자가 그 여자를 여기 숨겼는데 왜 그런지 아나?]
[원 꼴 같지 않은 것이, 그러다가 괜히 목 달아날라.]
둘이 시시덕거리며 주고받는 얘기다. 곽정은 생각에 잠겼다.
(원래 완안강이 좋아하는 여자가 있었나? 그래서 그 목아가씨를 맞이하지 않으려 했었는가? 하지만 왜 여자를 집에 감금하지? 혹시 말을 듣지 않아서 그랬는지도 몰라.)
두 사람과의 거리가 점점더 가까와졌다. 한 사람은 손에 초롱불을, 다른 한 사람은 식기를 들고 있다. 둘 다 파란 모자의 하인 차림이다. 식기를 든 녀석이 웃는다.
[사람을 가두어 놓고 또 굶어 죽을까 봐 이렇게 늦은 밤에 밤참을 갖다 주라니 원.]
[이건 풍류를 즐기는 것도 아니오, 그렇다고 알뜰살뜰 위해 바치는 것도 아니오, 어떻게 그 미인의 마음을 사겠다는 건지.]
둘은 서로 주거니 받거니 멀리 사다져갔다. 황용은 호기심이 발동하는 눈치다.
[우리 한번 슬그머니 쫓아가 봐요. 어떤 미인이 갇혀 있나 보게.]
[약을 훔쳐내는 일이 더 급해.]
[난 미인 구경부터 먼저 할래요.]
곽정은 어쩔 수 없이 황용의 고집에 따랐다. 조왕부의 뜰은 넓기 그지없었다. 꼬불꼬불 한참이나 따라가자 어둠침침한 건물 앞에 당도했다. 황용과 곽정은 한 쪽으로 몸을 숨기고 지켜본다. 두 하인과 간수를 보는 친병이 수군거리고 나더니 그제야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게 한다. 황용은 돌을 들어 쉭 하고 풍등(風燈)을 깬다. 곽정의 손을 더듬어 잡고 하인들보다 먼저 바람처럼 문 안에 들어섰다. 두 하인과 친병은 투덜거리며 부싯돌을 찾아 다시 불을 붙인다.
두 명의 하인이 다시 앞에 있는 쪽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서고 황용과 곽정도 그들의 뒤를 따랐다. 철책의 난간이 얼기설기 얽혀 있는 게 영락없는 감옥이다. 난간 저쪽에 두 사람이 웅크린 채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하나는 남자요, 다른 하나는 여자다. 하인 하나가 촛불에 불을 붙이고 손을 뻗어 그 안에 밀어 넣었다. 촛불이 두 사람의 얼굴을 밝힌다. 곽정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남자는 수염이 텁수룩하고 얼굴에 노기를 띤 것이 낮에 만났던 목역이요, 고개를 푹 숙인 묘령의 소녀는 목역의 딸인 목염자가 아닌가?
(아니, 완안강 그 녀석이 무엇 때문에 이들 부녀를 감금했을까?)
두 명의 하인이 밤참으로 내온 먹을 것들을 한 접시씩 꺼내 철책 안으로 늘어놓는다. 목역이 그 중 하나를 집어 던지며 소리를 버럭 지른다.
[꼼짝없이 네놈들 손에 갇혔으니 죽일 테면 죽일 일이지 무엇때문에 이따위 짓들이냐?]
욕소리가 꺼렁쩌렁 울리는 가운데 문 밖의 친병들이 인사하는 소리가 섞여 들렸다.
[왕자님, 안녕하십니까?]
황용과 곽정이 서로 바라다보다가 문 뒤로 몸을 숨겼다. 완안강이 재빠른 걸음으로 들어서며 호통을 친다.
[어느 놈이 목나으리의 화를 돋우었느냐? 좀 있다가 다리를 분질러 놓으마!]
두 명의 하인이 땅바닥에 꿇어 엎드린 채 머리를 조아린다.
[용서하십시오!]
[물러들 가거라.]
[네. 네.]
몸을 일으켜 세우고 나가며 서로 혀를 내밀어 휘두른다. 완안강은 그들이 나가고 문을 닫자 부드러운 표정으로 입을 연다.
[제가 두분을 이리로 모신 것은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 그런 것이니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죄인 다루듯 이곳에 가두고 모셨다니 그게 말이냐?]
[네 네, 죄종합니다. 두 분께서 잠시만 참아 주십시오. 제 마음도 지금 몹시 괴롭습니다.]
[이놈아, 세 살 먹은 어린애라도 안 속겠다. 말이면 다 말인 줄 아느냐? 고얀놈 같으니라구....]
완안강이 몇 번 입을 열려고 했지만 목역이 퍼부어 대는 욕에 눌리고 만다. 완안강은 여전히 부드러운 표정으로 화도 내지 않고 웃고만 있다.
목염자가 한참 듣다가 아버지를 만류한다.
[아버지, 뭐라고 하나 좀 들어 보기나 하세요.]
목역이 코방귀를 뀌고 그제야 입을 다문다.
[따님같이 훌륭한 아가씨를 제가 싫어할 리 있겠습니까?]
목염자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군다.
[다만 저는 왕작(王爵)의 세자로 있는 신분입니다. 가훈도 엄한데 만일 제가 강호의 영웅과 무슨 혼약을 했느니 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알아 보세요. 부왕께서 책망하심은 물론 성상 폐하께서도 엄한 꾸중을 내리실 것입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딴은 그럴 듯도 했다.
[그래, 어떻게 하겠다는 말이냐?]
[제 생각은, 불편하시지만 우선 여기 머무르시면서 상처나 치료하시고 고향에 내려가 계셨으면 합니다. 한 일 년이 지난 뒤 풍문이 잠잠해지면 그때 제가 댁으로 찾아뵘고 청혼을 하든지 아니면 직접 목나으리께서 따님을 모시고 제 집에 오셔서 결정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목역은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었다.
[이 일을 지금 부왕께서 아시게 되면 혼사만 그르치게 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제 잘못으로 부왕은 몇 차례나 성상의 책망을 들으신 일이 있습니다. 그러니 당분간 비밀을 지키고 참아 주세요.]
[자네 말대로다면 내 딸은 평생토록 슴어 살란 말이나 같지 않은가? 떳떳한 부부가 아니니 말일세.]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달리 배려를 하겠습니다. 장래 조정의 대신께 청해 중매를 서시게 하면 일이 자연히 잘 풀릴 것 아니겠습니까? 아무 염려 마십시오.]
목역은 얼굴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그럼 자네 어머님을 이리로 모셔다가 함께 언약을 하도록 하세.]
[저의 어머님을 어떻게 이리로 모십니까?]
이 말을 들은 목역은 단호하게 버틴다.
[자네 어머님을 뵙기 전에는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겠네!]
다시 술주전자를 집어 던진다. 목염자는 완안강과 무예를 겨룬 후 벌써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그린데 이제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데도 아버지가 공연히 화를 내시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완안강이 소매를 뒤집어 주전자를 받아 다시 제자리에 올려 놓는다.
[그럼, 전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간다. 곽정은 옆에 숨어 완안강의 말을 다들었다. 그에게도 물론 고충은 있을 것이다. 또 그가 제시한 방법이 가장 타당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래도 내가 나서서 권고를 해야겠구나.)
몸을 일으켜 세우는데 어느새 황용이 그의 옷을 잡아 끌며 문밖으로 빠져 나왔다. 완안강이 하인 하나를 보고 묻는다.
[가져 왔느냐?]
[네, 여기 있습니다.]
손을 들어 한 마리의 토끼를 내민다. 완안강이 그것을 받아 즉석에서 두 다리를 분질러 품속에 숨기고 빠른 걸음으로 그 자리를 떠난다. 토끼는 바둥거린다. 곽정과 황용은 이상하다고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멀찌기 떨어져 그의 뒤를 밟았다. 대나무 울타리를 도니 하얀 벽에 까만 기와지붕을 이은 세 간짜리 조그만 집 한 채가 보었다. 이는 강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가옥이다. 이렇게 호화롭고 웅장한 왕부의 으리으리한 저택 가운데 이런 집이 있다는 것은 놀랄 일이다. 완안강은 이 집의 판자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며 소리를 지른다.
[어머니!]
안에서는 다정한 여자의 대답이 들렸다.
[그래.]
황용과 곽정은 뒤꼍으로 돌아 창 앞에 서서 안을 훔쳐본다. 중년의 여자 하나가 책상 앞에서 턱을 손으로 괴고 멍하니 먼 산을 바라보듯 앉아 있었다. 나이는 40여 세, 수려한 용모에 수수한 옷차림, 머리 위엔 한 떨기 흰 꽃이 꽂혀 있었다. 완안강이 다가가 손을 잡는다.
[어머니, 오늘 어디 불편하세요?]
[늘 네 일 때문에 걱정이 아니냐?]
한숨을 길게 내쉰다.
[저 이렇게 얌전하게 여기 있잖아요.]
몸을 자기 어머니에게 기대며 사뭇 어리광 섞인 말투로 응석이다.
[오늘 일, 네 아버지가 아신다 해도 별 상관 없다. 그러나 만일 네 사부님께서 아시게 된다면 그건 보통 일이 아니야.]
[어머니, 오늘 중간에 나서서 만류했던 그 도사가 누군지 아시기나 하세요?]
완안강이 웃으며 하는 말이다.
[그래 누구기에 그러느냐?]
[바로 사부님의 사제예오.]
여자는 깜짝 놀란다.
[큰일났구나, 내가 네 사부님 화나신 걸 본 일이 있는데 살인을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으시단다.]
[사부님이 살인하는 걸 보셨어요? 어디서요? 무엇 때문에 살인을 했어요?]
그 여자는 고개를 들고 촛불을 응시한다. 정신을 잃은 듯 멍하니 한참 동안이나 침묵에 잠겼다가 천천히 입을 뗀다.
[아주 먼 옛날의 얘기란다. 아이, 옛날 일 이제 나도 거의 다 잊어버렸다.]
완안강은 더 묻지 않고 득의 양양하게 말문을 연다.
[그 왕사숙이 우리 집에까지 와서 그 혼사를 어떻게 하겠느냐구 물어요. 그래서 대답해 버렸어요. 그 목씨들을 찾아와서 하자는 대로 하겠노라구요.]
[그래 네 아버님께 여쭈어 보았느냐? 허락하실 것 같으냐?]
[어머니는 너무 순진하셔서 탈이야. 벌써 그 목씨 부녀를 속여 후원에 가두어 버렸어요. 왕사숙이 어디 가서 그들을 찾아낼 것 같습니까? 어림없는 일이지요.]
완안강은 재미있다는 태도요, 밖에서 듣고 있는 곽정은 몸을 부르르 떤다. 그 여자는 못마땅하다는 눈치로 아들을 나무란다.
[네가 다른 집 규수를 희롱하고 그것도 부족해서 집에 가두다니 말도 안 된다. 어서 내보내도록 해라. 은자나 두둑이 주면서 사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
[어머닌 모르세요. 그 같은 강호의 인물들은 돈 같은 거 대단하게 여기지 않아요. 그들이 나가서 소문이나 퍼뜨려 보세요. 금방 사부님 귀에 소식이 들어가게요?]
[그럼 넌 일평생 그들 부녀를 여기에 가두겠단 말이냐?]
[그게 아녜요. 잘 달래서 고향에 내러가게 하면 돼요. 가서 평생 기다리거나 말거나 그건 제가 알 바 아니구요.]
곽정은 듣다 못해 몸을 부르르 떨며 번쩍 주먹을 치켜들고 소리를 지르려 했다. 그런데 부드러운 손길이 어느새 자기 입을 막았다. 동시에 다른 한 손이 허공에 치켜든 자기 손을 휘감아 내렸다.
[화 내면 안 돼요.]
황용이 가볍게 곽정의 귀에 입을 내고 속삭이고 있었다. 곽정은 황용을 바라다보며 가벼운 미소를 보내고 눈길을 다시 방안으로 돌렸다. 완안강이 어머니를 향해 계속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목가 영감이 어찌나 교활한지 잘 말려들지 않아요. 며칠 더 가둬 두면 그땐 말을 듣겠지요.]
[내가 보기엔 그 아가씨 인품이 그만하면 훌륭하더다. 차라리 네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결혼을 해 보자. 그럼 아무 일 없이 깨끗하지 않겠니?]
[어머닌 또 쓸데없이 그러시네오. 우리 집안의 체면으로 보아 어떻게 그런 비천한 여자와 결혼을 합니까! 아버지께서 늘 훌륭한 집안과 사돈을 맺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아버지와 성상이 친형제만 아니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그게 무슨 말이냐?]
[그렇지만 않다면 공주를 아내로 맞을 텐데 말입니다. 그럼 부마가 아녜요. 어머니!]
그 여자는 한숨을 내쉬며 아무 말이 없다.
[어머니 글쎄, 그 목가가 말에요, 어머니를 뵙겠다는군요. 어머니 말을 들어야 믿겠다나요.]
[난 부도덕한 일은 못 한다. 그런 일에 나설 수야 없다.]
완안강이 허허거리며 방안을 이리저리 거닐며 몇 바퀴나 돈다. 황용과 곽정이 방안의 살림을 살펴보니 탁자며 걸상이 모두 조잡한 나무로 만든 것이고 침대나 기타 다른 용구도 모두 강남의 농가 그대로다. 벽에는 철창(槍) 하나와 밭갈 때 쓰는 보습이 걸려 있고 방 한 귀퉁이에는 물레까지 놓여 있다. 두 사람은 한결같이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 여자는 왕비의 귀한 신분인데 어꺼면 거실에 저런 것들을 가져다 놓았을까?)
이때 완안강이 자기 가슴을 두어 번 누른다. 찍찍 괴상한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냐?]
그 여자가 묻자 완안강이 대답한다.
[아, 깜박 잊을 뻔했군요. 돌아오다 길에서 다친 토끼 한 마리를 보고 주워 왔는데 어머니가 치료해 주세요.]
이렇게 말하면서 품속에서 아까 숨겼던 흰토끼를 꺼내 탁자위에 올려놓았다. 다리가 부러진 토끼다.
[참 착하구나!]
그 여자는 아들을 칭찬하며 약을 찾아 토끼를 치료해 준다. 곽정은 이제야 완안강의 인격을 확실히 알 듯했다. 어질고 착한 자기 어머니까지 이렇게 속여 가면서 칭찬 한 마디 듣겠다고 애매한 토끼 다리까지 부러뜨릴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음흉하고 악랄한 위인이겠는가? 어디까지나 제 잘못을 은폐하려는 수작임은 불문가지다. 황용은 곽정에게 몸을 기대고 서 있다가 부르르 떨고 있는 그를 슬그머니 잡아당겨 그 자리를 피했다.
[지금 그까깃 것 상관할 때가 아녜요. 어서 약이나 찾으러 가요.]
[그 약이 어디 있는지 알아?]
황용이 고개를 살래살래 흔든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찾아야 해요.]
곽정은 생각했다. 이렇게 큰 왕부의 그 어디에 약이 있는지 알고 찾는단 말이냐? 잘못하다가 사통천 같은 자들에게 들키게나 된다면 이건 수습할 수 없는 큰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어떻게 할까? 황용과 상의해 보려는데 불빛이 번쩍이더니 저쪽에서 한 사람이 초롱불을 들고 흥얼흥얼 노래를 읊조리며 이쪽을 향해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곽정이 나무 뒤로 몸을 숨기려 하는데 황용은 오히려 앞으로 나선다. 그자가 깜짝 놀라 누구냐고 물으려 하자 황용은 벌써 시퍼런 칼날을 그자의 목에 가져다 댔다.
[누구냐?]
조용히 묻는 황용의 목소리가 차디차다. 그자는 사시나무 떨듯 부들부들 떨다가 한참 만에야 우물쭈물 대답이다.
[네네...., 저는 왕부에서 집안 살림을 말아 보는 간(簡)집사입니다.]
[그래 집사라면 더욱 잘됐다. 오늘 왕자가 너희들을 시켜 성안을 뒤져 약을 사왔지? 그래 그 약이 어디 있는지 알겠구나?]
[모두 왕자께 갖다 드렸을 뿐 어디 두었는지 저는 모릅니다.]
황용은 왼손으로 그자의 팔뚝을 비틀며 칼 귄 손에 살짝 힘을 준다.
[말을 할 테냐? 안 할 테냐?]
[저는 정 말 모릅니다.]
황용이 왼손을 뒤집자 녀석의 팔뚝이 뚝 하고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오른손으로 녀석의 모자를 벗겨 입 안에 쑤셔 박았다. 녀석이 기절을 하며 비명을 질렀지만 입 안에 물린 모자 때문에 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곽정은 예쁘기만한 황용의 수법이 이렇게까지 독하게 나올줄은 몰랐다. 황용이 왼손으로 두어 번 그자의 옆구리를 찌르자 정신이 드는 모양이다. 이번엔 다시 모자를 빼 머리 위에 뒤집어 씌우며 묻는다.
[어때? 이쪽 성한 팔뚝도 마저 분질러 주랴?]
그자는 눈물을 좔좔 흘리며 땅에 꿇어 엎드려 애걸한다.
[소인은 정말 모르는 일이습니다. 아가씨께서 소인을 죽이신다해도 소용이 없을 줄로 아룁니다.]
황용은 이자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았다.
[그럼 네가 지금 왕자께 가서 이렇게 아뢰어라. 잘못 넘어져 팔이 부러졌는데 의사의 말로는 혈갈(血竭)과 우칠(牛七), 웅담등이 있어야 치료를 할 수 있는데 지금 북경성 내에서는 구할 수가 없으니 불쌍히 여기시고 조금만 주십사고 말이다. 알겠느냐?]
그자는 황용이 무서워 시키는 대로 허리를 굽실거리며 연방 대답을 했다.
[왕자는 지금 왕비의 거처에 있다. 빨리 가라. 만일 잘못하다가 탄로라도 나면 네 목을 비틀고 두 눈을 뽑아 버리겠다. 나도 너를 따라갈 테니 조심하여 착오 없으렷다.]
그자는 아픈 것을 참느라 이를 악물고 일어나 왕비의 거처로 갔다. 완안강은 그때까지 어머니 앞에서 이 얘기 저 얘기 늘어 놓고 있다가 눈물 콧물이 뒤범벅된 집사가 달려와 황용이 시킨 그대로 하는 말을 들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조왕비(趙王妃)는 천성이 어진 사람이라 측은한 생각이 들어 아들이 대답하기도 전에 빨리 주라고 성화같이 재촉이다. 완안강이 이마를 찌푸리고 대답을 했다.
[그 약은 모두 양(梁)선생이 달라고 해서 주었으니 네가 거기가서 얻도록 하려무나.]
그 집사는 울상이 되어 말한다.
[그럼 왕자님께서 쪽지라도 한 장 써 주십시오.]
조왕비가 서둘러 문방 사우를 챙겨 놓자 완안강은 할 수 없이 약을 주라고 몇 자 적어 주었다. 집사는 계속해서 이마를 조아리며 사례를 한다.
[빨리 가 보아라. 상처가 나은 뒤에 와 이마를 조아려도 늦을 것 없다.]
조왕비가 오히려 더욱 급하게 서두른다. 집사가 물러나와 몇 발짝 걸어가자 차디찬 칼날이 어느새 뒷덜미에 와 닿는다.
[양선생이 묵고 있는 곳으로 가자.]
집사는 몇십 보 걷다가 더는 견디지 못하고 비틀비틀 쓰러지려 했다.
[약을 손에 넣지 못하면 네 왼팔도 성하지 못하리라.]
집사는 깜짝 놀라 식은땀을 흘린다. 어디서 생긴 힘인지 앞을 향해 힘차게 걸어간다. 도중에 7,8명의 하인배들을 만났지만 그들은 예사로 여기고 그대로 지나쳐 버리고 만다.
양자옹이 묵고 있는 관사에 이르러 그자가 들어가 보니 문이 밖으로 잠겨 있다. 다시 밖으로 나와 하인에게 물으니 화취각(華翠閣)에서 지금 조왕을 모시고 연회중이란다. 곽정은 그 집사가 불쌍해 보여 옆구리릍 받쳐 부축하고 셋이서 나란히 화취각을 향해 걸어갔다. 이제 얼마 가지 않으면 화취각이다. 파란 청의를 입은 남자 둘이 길을 막는다. 그 중 하나는 손에 칼을 들고 다른 하나는 채찍을 쥐고 있었다.
[게 섰거라. 누구냐?]
그 집사가 완안강이 적어 준 쪽지를 내보이니 불빛에 비쳐 보고 그대로 통과시킨다. 그리곤 다시 곽정,황용 두 사람에게 묻는다.
[우리 일행이오.]
집사의 대답이다. 불빛에 비친 그 청의의 두 사람은 다른 사람 아닌 황하사귀 가운데의 심청강과 마청웅이다. 그들 둘 다 황용에게 몇 차례니 골탕을 먹은 처지지만 소녀로 변한 그를 알아볼 리 없었다. 그러나 곽정을 발견하자 칼과 채찍을 들고 대들려 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순간적으로 갈비가 뜨끔거리며 꼼짝할 수가 없었다. 황용이 귀신도 모르게 그들의 혈도를 눌러 버린 것이다. 곽정은 그의 옆에 서 있었으면서도 언제 손을 썼는지 눈치도 못 챘다. 다만 그의 재빠름에 놀라 입을 벌리고 있다가 문득 생각나는 일이 있었다.
(그날 장자구의 술집에서 여자들이 대들어 내 보마를 뺏으려 할 때도 그들의 혈도를 찍어 땅에 누인 채 꼼짝못하게 만든 것도 바로 황용의 솜씨였구나.)
황용은 멍청하게 서 있는 그를 바라다보며 웃는다.
[무얼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심,마 두 사람을 끌어다 나무 뒤에 누이고 곽정의 손을 잡은 채 그 집사의 뒤를 따라 화취각에 당도했다. 황용이 그의 등을 밀어 안으로 들여보낸 뒤 곽정과 함께 몸을 날려 지붕으로 올라가 처마 끝을 잡고 안을 살펴보았다. 촛불이 휘황한 방안에는 잔치상이 차려져 있었다. 곽정은 식탁주변의 사람들을 휘둘러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낮에 자리를 함께 했던 백타산주 구양공자, 귀문용왕 사통천, 삼두교 후통해, 삼선노괴 양자옹, 천수인도 팽련호 등 거물급 고수들이 앉고, 그 밖에 대금국 육황자(六皇子) 조왕(趙王) 완안열이 의젓하게 거기 함께 있었다.
거물급 고수들이 둘러앉은 옆에 커다란 의자엔 두꺼운 방석을 깔고 대수인 영지상인이 앉아 있었다. 눈을 내리감고 얼굴이 백지장 같은 것이 결코 경상이 아닌 모양이다. 곽정은 마음속으로 슬그머니 기뻤다.
(네놈이 왕도사를 해치려 들더니 오히려 고소하게 됐다.)
그 집사가 안으로 들어가 양자옹을 향해 절을 한 뒤 완안강이 써 준 쪽지를 내밀었다. 양자옹이 쪽지를 다 읽고 집사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완안열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왕자님의 친필이 틀림없습니까?]
[그렇군요. 양공이 알아서 선처하시오.]
양자옹은 자기 뒤에 서 있는 청의의 동자를 바라다본다.
[오늘 왕자께서 보내신 약 가운데 이것들을 챙겨 저자에게 한냥씩만 주어라.]
동자가 대답을 하고 집사를 데리고 나온다.
[빨리 가요. 저 사람들 하나 하나가 모두 대단한 인물들이오.]
곽정이 황용의 귀에 내고 소곤거렸다. 황용은 웃으며 살레살레 머리를 흔든다. 황용의 부드러운 머리칼이 곽정의 얼굴을 스치며 간질간질하게 했다. 곽정이 몸을 솟구쳐 아래로 뛰어내리려 하자 어느새 황용이 그의 팔을 잡고 두 발을 낚시처럼 구부려 처마끝에 걸친 후 몸을 수그려 곽정을 땅으로 살머시 내려 놓았다.
곽정은 집사와 동자의 뒤를 따랐다. 뒤를 돌아보니 황용은 여전 그 자세로 처마끝에 매달린 채 방 안을 살피고 있었다. 하늘하늘 황용의 하얀 옷깃이 바람에 날린다. 한 송이 백합꽂이 어두운 밤에 활짝 핀 모양 그대로다.
황용은 계속해서 안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때 팽련호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그 번쩍이는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황용은 몸을 움츠리고 귀를 기울였다. 목 쉰 듯한 사람의 말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왕처일이 오늘 중간에 끼어든 것은 무의식중이었을까요? 아니면 고의로 나선 것일까요?]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무슨 상관이 있겠소? 어쨌든 오늘 영지상인에게 얻어맞았으니 죽지 않으면 병신이 될 게요.]
누군가가 대답하는 소리다.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황용이 살펴보니 키가 작달막하고 눈빛이 번쩍이는 팽련호다.
[전 서역에서 전진 칠자의 명성을 들었는데 정말 대단하더군요. 영지상인이 그가 떠날 때 그 대수인(大手印)으로 때렸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오늘 우리가 창피당할 뻔했습니다.]
맑은 목소리를 가진 사람의 말이다.
[구양공자는 그런 말 하지 마시오. 다 망신을 한 것이나 다름없소. 이기고 진 게 없는 게요.]
그러자 구양공자라고 불린 사람이 다시 말을 받는다.
[아무래도 저쪽은 죽지 않으면 병신이 될 것은 뻔한 일이고, 영지상인은 며칠 정양하시면 낫겠지요.]
말소리가 멎고 서로 술만 권해 마신다.
[여러분께서 불원 천리 찾아 주셨으니 어쨌든 영광스럽습니다. 이는 저희 대금국의 복이올시다.]
조왕인 완안열의 인사말이다. 좌중의 사람들이 몇 마디 겸양을 하자 완안열이 말을 계속했다.
[영지상인은 서장에서 득도하신 고승이시요. 양노인은 관외 일파의 종사이시며 구양공자는 줄곧 서역에서 명성을 떨치고 계시니 세 분 다 중원에는 처음 오셨습니다. 팽채주께서도 중원에서 이름을 날리시며 황하를 무대로 활약하고 계신 분입니다. 다섯 분 중에서 단 한 분만 칼을 뽑고 도와 주신다 해도 대금국의 대사는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는데 이렇게 다섯 분이 일시에 나오시니, 하하하.]
득의 만면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자 양자옹이 말을 받는다.
[사람을 보내 부르셨으니 무슨 분부를 내리신다 하더라도 견마지로를 다 할 생각이오. 하하하.]
그들 모두 수십 년 동안 제 나름대로 천하를 종횡했다는 사람들이라 자존 자대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래서 말투 가운데도 은근히 자기를 드러내겠다는 저의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완안열이 다시 또 여러 사람들에게 술잔을 권한다.
[제가 여러분을 오시라고 한 것은 물론 생각한 바 있어서 그랬습니다. 여러분께서 아신 뒤에라도 결코 다른 사람에게 이 일을 말씀하시면 곤란합니다. 이 점을 믿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완안열이 말은 비록 간곡하고 은근하게 하지만 기실 비밀을 지키라는 엄포였다.
[그 점은 안심하십시오. 이곳에서 나온 말은 절대 밖으로 새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각자 모두 완안열이 많은 돈을 들여 사온 사람들이다. 만약 중대한 음모가 아니라면 그렇게 많은 힘과 재물을 써서 데려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계속 말을 꺼내지 않았고 그들도 묻기가 거북했었는데 이제 그 중대한 기밀을 꺼내니 호기심도 생기고 긴장도 되었다.
[대금 태종(大宗) 천회(天會) 삼 년. 그러니까 조관(趙官) 휘종(徽宗) 선화(宣和) 칠 년이군요. 우리 금나라는 점몰갈(粘沒喝), 간이부(幹離不) 두 원수에게 군대를 통솔시켜 송나라를 정벌케 하여 송나라 휘종(徽宗),흠종(欽宗)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그때부터 저희 금나라 군사는 더 할 나위 없이 막강해졌습니다. 그때 우리 금나라의 세럭으로 말하면 능히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백 년, 조관(趙官)은 아직도 항주에서 황제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 있는지 여러분은 아십니까?]
모인 사람들은 국가대사에 관한 얘기가 나오자 약간 놀라왔다.
[그 점은 직접 말씀을 해 주셔야지요.]
양자옹이 말하자 완안열은 한숨을 내쉰다.
[우리 금나라가 악비(岳飛)에게 연패를 당한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일입니다. 우리 대금국의 원수인 올출(兀朮)이 용병에 능했지만 악비만 만나면 지리 멸렬하고 말았습니다. 뒤에 악비는 우리 대금국의 수명을 받은 진회(秦檜)에게 살해되기는 했지만 금나라 군사들은 사기가 크게 떨어져 다시는 남정할 기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이 일을 달성시켜 대금국 성상을 워한 충성을 표시하고 싶은데 여러분의 도움 없이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듣고 각자 서로 전너다보며 그의 의도를 파악 못 하는 눈치들이다.
(아니, 우리를 보고 군대를 인솔하고 남정을 하란 말인가? 그런 전쟁이라면 우리 무림의 고수들은 모두 문외한인데.)
완안열은 십분 득의 만면하면서도 말투는 어딘가 떨려 나왔다.
[몇 달 전 제가 궁중에서 우연히 전조(前朝)의 문서 한 통을 발견하게 됐는데 그게 바로 악비가 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문구가 이상야릇했습니다. 몇 달 동안 곰곰 생각해 보고야 비로소 그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악비는 자기가 얼마 살지 못할 것을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가 정충 보국(精忠報國)의 충신이라고 하더니 과연 그 이름이 헛되지 않았음니다. 평생에 걸쳐 배운 행군(行軍) 출진(出陣) 연병(練兵) 공벌(攻伐)의 비결을 상세하게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후세에 전하여 언제든지 우리 대금국에 대항하겠다는 의도였습니다. 그런데 진회라는 이자도 만만치 않아 혹시 악비가 외부와 어떤 내통을 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철통 같은 감시를 했습니다. 옥중의 관리나 옥졸들을 모두 자기 심복으로만 채웠습니다. 그래서 악비는 죽는 날까지 이 병서를 아무에게도 전하지 못했지요.]
여러 사람들은 얘기에 정신이 팔려 술 마시는 것도 잊고 있었고 황용 역시 재미있는 이 얘기를 치음부터 끝까지 뜩똑히 들을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악비는 어쩔 수 없이 이 책을 몸에 숨기고 한 통의 유서만 남겼습니다. 그런데 이 유서의 문리(文理)가 엉망 진창이에요. 진회가 장원 재상의 재주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유서를 보고 난 뒤 그 뜻을 알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 그 유서를 금나라에 보냈웁니다. 금나라에서는 그것을 궁중의 비밀 문서함에 보관했지만 아무도 그 뜻은 파악하질 못했습니다. 다만 악비가 죽을 무렵이다 분통이 터져 정신이 돌았던 게 아니냐고들 했지요. 하지만 그 가운데 굉장한 수수께끼가 숨어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던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은 완안열의 재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만일 그 병서만 손에 넣게 된다면 대금국이 천하를 통일하는 것은 여반장일 겝니다.]
(원래 우리를 보고 도굴에 가담하라는 얘기였구나.)
이제야 그들은 완안열이 자기들을 청해 온 의도를 알게 되었다.
[재 생각으로는 그 병서가 반드시 악비의 무덤에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모두 대영웅이시며 대호걸들이신데 설마하니 도굴에 가담해 달라고야 할 리 있겠습니까? 게다가 그 악비가 우리의 원수이기는 하지만 그의 충성을 천하 사람들이 흠모하고 숭상하는데 어떻게 그의 묘지를 건드릴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 일 때문에 여러 해 동안 고심해 오면서 남조(南朝)의 밀정들이 수차례에 걸쳐 보내온 정보를 종합한 결과 다른 실마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원래 당시 악비는 풍파정(風波亭)에서 살해되어 부근의 중안교(衆安橋)에 매장되었습니다. 뒤에 송나라 효종(孝宗)이 그의 시체를 서호 옆으로 옮겨 안장하고 사당을 지었는데 그의 외관이나 유물은 다른 곳에 보관되었습니다. 역시 송조의 서울인 임안(臨安)에 있었습니다. 이 병서를 입수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남방에도 재주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만에 일이라도 그들에게 탄로되어 빼앗기게 되는 날에는 대금국 국운에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신중을 기하기 위하여 특별히 여러분을 모시고 도움을 청하게 된 것입니다.]
듣고 있던 사람들이 그제야 머리를 끄덕거렸다.
[제가 염려하는 것은 악비의 의관과 유물을 옮길 때 혹시 어떤 사람이 그 병서를 가져가지는 않았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또 곰곰 생각해 보면 그럴 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송나라 사람들이 그렇게나 악비를 숭앙하는데 어찌 그의 유지도 없이 함부로 유물에 손을 대었겠습니까? 우리가 그곳에 가기만 하면 틀림없이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 이 일이 어렵다고 느끼십니까? 어렵다면 한없이 어렵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생각해 보면 또 쉽게 해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유물이 있는 곳은....]
여기까지 말했는데 갑자기 대문이 벌컥 열리며 한 사람이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양자옹 앞으로 달려가 소리를 지른다.
[사부님....]
여럿이 놀라 바라다보니 양자옹이 약을 가져오라고 보냈던 청의의 동자가 얼굴에 파랗게 멍이 들어 달려온 것이다.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