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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년 역사와 이야기, 골목에서 과거와 만나다
    KOREA 2017. 9. 15.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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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년 역사와 이야기, 골목에서 과거와 만나다

    대구 근대골목 제2코스 ‘근대문화골목’ 여행

    9월, 뜨겁기로 악명 높은 ‘대구’에도 가을이 찾아들었다. 한증막 같은 열기 때문에 대구 여행을 주저했다면 지금이 최적기다. 아직 선명한 초록빛 이파리와 높아진 하늘이 어우러져 여름 도시 대구를 만끽하기 좋다. 대구 여행에서 가장 추천하는 코스는 대구 근대골목 코스 중 제2코스 ‘근대문화골목’이다. 근대문화골목에서 같은 공간, 다른 시간에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느껴보는 건 어떨까.

    이상화 고택에서 바라본 근대문화골목. 저 멀리 제일교회가 보인다.(사진=대구중구청)
    이상화 고택에서 바라본 근대문화골목. 저 멀리 제일교회가 보인다.

    인터넷을 들썩이게 만드는 글 중에서 유달리 대구는 다른 지역보다 날씨에 대한 글이 많다. 차 보닛 위에 달걀을 터뜨렸더니 익었다거나, 바나나가 열리는 동네라거나, 아프리카 사람도 대구에서는 더위 때문에 보약을 먹는다는 등 마치 도시 괴담처럼 대구의 더위에 대한 이야기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9월에 접어들 무렵 찾은 대구는 악명이 무색하리만큼 선선했다. 이따금 땀이 차오를까 싶으면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줬다.

    동대구역에서 대구 근대골목 제2코스 ‘근대문화골목’까지 지하철로 15분 내외면 도착한다. 근대문화골목은 ‘동성로’로 불리는 대구 번화가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한때 성안에서 번영을 누렸던 구도심이 있던 자리다. 산업화 이후 새 도심에 대구백화점 같은 랜드마크가 생기면서 구도심은 생기를 잃은 듯 빠르게 활기가 식어갔다.

    오랜 시간 동안 대구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가던 구도심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한 건 이 일대가 새로운 관광지로 각광받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대구는 6·25전쟁 무렵 낙동강 전선 안쪽에 위치해 전쟁의 위협에도 안전했던 도시다. 덕분에 근대문화유산이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전해오고 있다. 대구시는 이런 이점을 살려 관광지로 개발한 결과 2012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한국 관광의 별’ 장애물 없는 관광자원 부문에서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대구 근대골목 제2코스 ‘근대문화골목’ 지도. 청라언덕에서 진골목까지 대략 2시간이 소요된다.
    대구 근대골목 제2코스 ‘근대문화골목’ 지도. 청라언덕에서 진골목까지 대략 2시간이 소요된다.

    대구 근대골목은 경상감영달성길, 근대문화골목, 패션한방길, 삼덕봉산문화길, 남산 100년 향수길 등 총 다섯 코스로 구성됐다. 그중 방문객에게 가장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코스는 제2코스 근대문화골목이다. 근대문화골목은 대구 근대문화의 흔적을 따라 걷는 길이다. 도심 곳곳에 숨은 명소가 많아 약 1.6km의 짧은 코스인데도 다 돌아보려면 넉넉잡아 두 시간은 족히 걸린다.

    근대문화골목은 노래로 시작한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로 시작하는 ‘동무 생각’은 한국인의 귀에 익은 노래다. 1922년 박태준이 작곡한 ‘동무 생각’은 나오자마자 삽시간에 당시 젊은이들의 유행가가 됐다. 시인 이은상이 박태준의 계성학교 시절 로맨스를 듣고 노랫말을 붙였다. 노랫말처럼 푸른 담쟁이 덩굴이 휘감고 있는 청라언덕은 백합같이 고왔던 소녀와 계성학교 소년의 싱그러운 첫사랑이 피었던 자리다.

    미국인 선교사 스윗즈가 살았던 스윗즈 저택. 서양식 주택과 정원이 이국적인 풍취를 자아낸다.(사진=대구 중구청)
    미국인 선교사 스윗즈가 살았던 스윗즈 저택. 서양식 주택과 정원이 이국적인 풍취를 자아낸다.

    청라언덕에는 박태준의 로맨스 외에도 다른 이야기가 서려 있다. 이곳은 기독교가 대구에 뿌리내려 정착하고 지금의 동산의료원이 세워졌던 곳이다. 청라언덕 위에는 빨간 벽돌을 쌓아올려 지은 양옥주택인 스윗즈 저택, 챔니스 저택이 있다. 집의 이름은 1900년대 초 대구에 정착했던 미국인 선교사의 이름을 땄다. 푸른 조경이 이국적인 저택 풍경을 뒤로하고 집 안으로 들어서면 고풍스러운 장식품과 가구를 통해 당시의 생활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청라언덕을 뒤로하고 계산성당으로 향하는 길이 바로 3·1만세운동길이다. 1919년 전국적으로 번졌던 만세운동은 대구 역시 비켜가지 않았다. 3·1만세운동길은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계성학교, 신명학교, 대구고보 등의 학생들이 3·1운동 집결지인 도심으로 향했던 길이다. 그 당시 이 길에 소나무가 우거져 일본 순사의 눈을 피하기 안성맞춤이었다. 약 100년이 지난 지금은 학생들을 가려줬던 소나무 대신 벽 곳곳에 태극기가 방문객을 향해 펄럭이고 있다.

    1919년 대구 학생들이 3·1운동 집결지로 향했던 3·1만세운동길.
    1919년 대구 학생들이 3·1운동 집결지로 향했던 3·1만세운동길.

    100년 이야기 간직한 청라언덕, 3·1만세운동길

    3·1만세운동길을 지나 횡단보도를 건너면 웅장한 자태를 뽐내는 계산성당과 마주한다. 계산성당은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역 가톨릭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우뚝 솟은 쌍탑이 특징인 계산성당은 고딕 양식 특유의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성당 내부로 들어서면 갓을 쓴 순교자의 모습이 새겨진 스테인드글라스가 눈에 띈다. 믿음을 위해 목숨도 마다하지 않은 100여 년 전 사람들의 숭고한 뜻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여전히 살아 숨 쉬는 듯하다. 성당 내부에 양옆으로 줄지어 늘어선 기둥에는 곳곳에 십자가 문양이 새겨져 있다. 계산성당의 성스러운 아름다움 때문인지 이곳에서 많은 유명 인사가 결혼식을 올렸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계산성당에서 식을 올리거나 웨딩 촬영을 하러 온다. 특히 온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고(故) 김수환 추기경이 사제서품식을 받은 곳이기도 하다.

    계산성당을 나와 빨간 벽돌이 담을 이룬 이상화·서상돈 고택으로 향한다. 이상화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유명한 항일 시인이다. 이상화는 대구 서성로에 있는 이 집에서 1939년부터 1943년 사망하기 전까지 머물렀다. 이상화의 가족은 모두 독립운동을 한 애국자 집안이다. 형인 이상정 장군은 독립운동가로 활동했고, 형수인 권기옥은 우리나라의 첫 여성 비행사였다. 권기옥은 “비행기를 타고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지겠다”고 결심한 여장부다. 이런 가족들 사이에서 이상화가 항일에 뜻을 품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눈을 감기 직전까지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했지만, 그의 작품이 조선인에게 끼칠 영향을 두려워한 일제가 이상화의 원고를 모두 압수하는 바람에 생전에 시집 하나 남기지 못했다. 아담하고 단정한 고택에는 나라를 잃은 시인의 낭만과 사회 개혁 의지, 일제에 대한 저항 등 복잡한 내면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하다.

    이상화 고택 옆에는 민족운동가 서상돈 고택이 있다. 서상돈은 국채보상운동을 통해 국권 회복을 꿈꿨다. 서상돈은 17세 때 보부상을 시작으로 큰 부를 축적해 대지주가 됐다. 하지만 조선이 일제에 국권을 침탈당하자 자신의 재산을 털어 독립운동을 하는 데 앞장섰다. 그가 주창했던 국채보상운동은 당시 고관·양반·노동자·농민·부녀자 할 것 없이 전 계층이 참여할 정도로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운동이다. 그러나 곧 일제의 갖은 방해로 국채보상운동이 진전을 보이지 않자 서상돈은 실업 진흥으로 민족의 실력 양성에 힘썼다. 두 고택이 자리한 곳에는 근대체험전시관 ‘계산예가’가 있는데, 이곳에서 계산동에 머물렀던 예술가들의 삶을 담은 영상을 볼 수 있다. 빼앗긴 들에서 혹독한 겨울을 이겨냈던 이들의 마음을 짐작해보는 것도 좋겠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유명한 항일 시인 이상화가 살았던 고택.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유명한 항일 시인 이상화가 살았던 고택.

    역사, 문학에 등장하는 약령시, 진골목

    이상화·서상돈 고택을 나와 대구 도심 방향으로 향하다 구수한 한약 냄새가 코끝을 스치면 약령시에 도착한 것이다. 대구 약령시는 조선시대부터 이어온 3대 한약재 전문 시장이다. 곳곳에 현대 건물이 들어선 약령시 곳곳에서는 지금도 한약재를 파는 약재상을 만날 수 있다.

    한약 냄새를 뒤로하고 북쪽으로 가다 보면 종로에 들어선다. 서울, 수원의 지명과 동일한 이곳은 종각이 있던 길이라 종로라고 불린다. 종로는 조선시대 이후 여전히 대구 중심지에 있는 주요 도로다. 예전에는 경상감영과 대구읍성의 남문인 영남 제일관이 있었다. 달구벌로 향하는 관문인지라 많은 사람이 드나들었다. 특히 근처에 있는 약전골목에서 유입되는 거액의 현금 때문에 요정이나 기생의 권번 같은 유흥시설이 많았다. 요정과 기생이 사라진 종로는 전통주점, 맥주펍, 막창 가게 등으로 바뀌어 젊은이들의 유흥을 책임지며 여전히 대구의 밤을 밝히고 있다. 종로 일대는 김원일의 소설 <마당 넓은 집>의 배경이기도 하다. <마당 넓은 집>은 한국전쟁 전후의 대구를 배경으로 주인공 길남이가 자라나는 성장 과정을 담은 자전적 소설이다. 소설 속 길남이가 뛰어다녔던 곳을 기억한다면 종로에 들어서는 순간 마치 소설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영남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가는 길목에 위치한 영남대로.
    영남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가는 길목에 위치한 영남대로.

    <마당 넓은 집>에 등장하는 ‘정소아과’가 있는 진골목은 대구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다. 골목 이름을 ‘길다’의 사투리 ‘질다’에서 따온 진골목은 내로라하는 대구 유지가 많이 살았던 곳이다. 대구 토박이 달성 서씨 부자 서병국과 형제들, 코오롱 창업자 이원만, 금복주 창업자 김홍식 등이 이 일대에서 유명했다. 지금은 이들이 하나둘 떠나면서 화교협회, 정소아과의원, 식당으로 남아 있다. ‘정소아과’는 1937년 민간 자본으로 지은 최초의 서양식 주택이다. 정소아과 건물은 변형이 거의 없어 일제강점기 시절 상류층의 주거 문화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달성 서씨 부자가 살다가 1947년 정필수 원장이 매입해 정소아과 건물로 사용했다. <마당 넓은 집>에 언급되기도 했지만 정소아과는 대구 사람들이 많이 이용했던 병원이다. 지금은 정 원장의 건강 문제로 병원이 운영되지 않지만 병원의 모습은 처음 지어졌을 때와 변함이 없다.

    정소아과를 나와 골목을 따라 죽 내려가면 미도다방이 보인다. 사라져가는 전통 다방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지금도 옛 추억이 그리운 많은 노인과 예술가가 자주 찾는 곳이다. 한때는 유학자들이 많이 방문해 ‘양반다방’이라고도 불렸다. 미도다방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정인숙 대표가 30년 이상 한자리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고운 한복을 입고 달걀을 톡 터뜨린 쌍화차를 내오는 정 마담의 모습에서 흘러간 시절 사랑방의 추억이 묻어나는 듯하다.

    대구 근대골목 투어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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