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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산 차 대표 생산지, 차의 고장 하동에 가다KOREA 2017. 10. 10. 20:21반응형
지리산, 섬진강, 재첩, 소설 <토지> 등과 함께 하동을 대표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차’다.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하동은 국내 최대 야생차 생산지다. 1200년이 넘는 오랜 세월에 걸쳐 우리 전통차를 재배하고 있는 차의 고장 하동으로 떠났다.
9월 중순에 접어든 하동 일대는 하늘이 높다. 여름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았지만 간간이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에서 가을이 느껴졌다. 경남과 전남의 경계에 위치한 하동으로 가는 길에서 가장 먼저 만난 것은 섬진강이다. 폭우가 쏟아져 물이 불어난 섬진강은 넉넉한 물결이 잔잔하게 일렁였다.
하동군 화개면으로 들어서자 아직 초록을 벗지 못한 벚나무 이파리가 빼곡하게 그늘을 만들었다. 벚나무 뒤에는 지리산이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늦여름 지리산을 싱그럽게 만든 초록 잎을 자세히 보니 차나무였다. 하동군 화개면 일대에 있는 산은 전체가 광활한 녹차밭이다. 농촌 마을의 집 앞마당에 작은 논과 밭이 조성돼 있는 것처럼 화개면에는 마을 곳곳에 크기가 제각각인 녹차밭이 자리하고 있다. 국내 최대 야생차 생산지다운 모습이다.
하동은 전남 보성, 제주 등과 함께 국내의 대표적인 차 생산지다. 하동의 차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처음 등장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1200년 전 신라 흥덕왕 3년(828년), 당나라 사신으로 갔던 대렴공이 차 씨앗을 갖고 신라로 돌아왔다. 대렴공은 왕명을 받들어 지리산 남녘에 있는 화개동천에 차 씨앗을 심었다. 하동이 우리나라 차 시배지(始培地)로 첫발을 내디딘 순간이다.
그렇다면 왜 하동에 차를 심었을까? 하동이 차 생산지로 선택된 것은 차나무 재배에 안성맞춤인 기후 여건 때문이다. 차나무는 따뜻하고 비가 많이 오는 기후에서 잘 자란다. 연평균 기온이 13℃ 내외, 연 강수량이 1400mm 이상이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기후 특성을 보이는 곳은 제주와 전남, 경남 등 국토의 최남단 일부다.
하동 화개면 일대의 녹차밭. 화개면은 국내 최대 야생차 생산지로 산 전체에 광활한 녹차밭이 조성돼 있다.(사진=C영상미디어) 1200년 전 하동, 우리나라 최초로 차나무 심어
하동 화개면 일대는 섬진강과 화개천이 인접해 안개가 많고 다습하다. 토양은 약산성에 수분을 적절히 머금고 있으며 자갈이 많아 차나무가 자라기 좋은 토질이다. 차를 생산하는 시기인 4월 하순부터 5월 하순이면 낮과 밤의 기온차가 큰 것도 장점이다. 이런 장점이 어우러진 화개계곡 입구에서 신흥마을까지 12km 구간은 하동에서도 차나무가 자라기 좋은 환경적 요인을 갖춘 곳이다. 이 일대는 전국 차 생산량의 23%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차나무가 자라기 좋은 최적의 조건을 모두 갖춘 하동의 차는 왕에게 진상품으로 올릴 만큼 품질이 좋기로 정평이 났다.
조선시대에도 하동 차는 명성이 대단했다. 조선 전기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한 하연은 판서 민의생이 중국으로 여행을 떠날 때 하동 차를 선물하면서 시를 주고받았다. ‘화개골의 차가 좋다고 익히 들었는데 맑기는 양선산 차 같고 차 향기 중하기는 금옥 같다오. 이 차에 마음을 담아 노자로 보내네’라는 시를 통해 그 당시 하동 차의 우수함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까지 명목을 이어오던 하동 차는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위기를 맞았다. 당시 일본에서 개량종이 한반도에 마구잡이로 유입되면서 재래종 차 재배에 적신호가 켜졌다. 일본 개량종이 차 시장에서 입지를 다지기 시작하자 하동 사람들은 이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하동에서 시작한 전통차의 명목을 유지하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한 결과 현재는 지역 토착 품종이 잘 유지되고 있다. 하동 차의 가치가 더욱 높이 평가되고 있는 이유다.
전통차를 지키기 위한 하동의 노력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하동군은 지역 특산물인 야생차를 명차화해 지역 성장을 주도하는 산업으로 발전시키고자 화개면 일대 24필지를 ‘하동야생차산업특구’로 지정했다. 이후 하동야생차산업특구에 하동 녹차를 브랜드화하기 위한 시설을 설립했다. 하동녹차연구소, 하동차문화센터, 녹차체험관 등은 하동군이 녹차 산업을 육성하는 전초기지로 활용하고 있다.
하동군의 녹차 산업 육성 노력은 차츰 결실을 맺고 있다. 세계 최대 커피 전문 프랜차이즈 ‘스타벅스’가 하동 차의 우수한 품질을 알아본 것이다. 하동군은 지난 1월 스타벅스 미국 본사와 친환경 가루녹차 판매 계약을 맺었다. 국내 스타벅스 매장에서는 제주산 녹차를 사용하고 있지만 미국 본사로 우리 녹차를 수출한 것은 하동군이 처음이다. 스타벅스는 계약을 체결한 당일 1차로 가루녹차 500kg을 미국으로 실어 갔다. 스타벅스를 통해 하동 녹차가 유럽·남미·아시아 등 전 세계 사람들이 즐기는 음료가 된 것이다.
전 세계인이 맛보는 차를 생산하는 화개면 일대가 가장 손이 바쁜 때는 어린잎을 따기 시작할 무렵인 4월 하순부터 5월 하순까지다. 하동의 차 재배 농가들은 찻잎을 수확할 시기가 되면 차 시배지에서 그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풍다제를 지낸다. 24절기 중 여섯 번째 절기인 곡우 전에 딴 햇차를 올리고 나면 차 농업이 시작된다.
하동은 전통 방식으로 차를 재배하는 만큼 차밭을 인위적으로 관리하지 않는다. 찻잎을 딸 때도 마찬가지. 보통 차나무는 층층이 비탈진 산자락에 산발적으로 분포돼 있어 찻잎을 수확하려면 사람이 손으로 일일이 따야 한다. 한 잎씩 손수 딴 찻잎은 솥에서 덖어 구수한 맛과 향을 지닌 수제 덖음차로 제다(製茶)된다.
하동의 전통 제다 방식은 5단계로 나뉜다. 첫째, 찻잎을 따고 고른다. 둘째, 뜨거운 솥에 찻잎을 넣고 빠르게 덖는다. 셋째, 찻잎이 알맞게 덖어지면 솥에서 꺼내 대자리에 놓고 둥글리듯이 비빈다. 넷째, 비빈 찻잎을 채에 넓게 펴서 건조시킨다. 다섯째, 솥에 넣고 불을 점점 줄이면서 한 번 더 덖는다. 이 같은 방식으로 다른 나라 찻잎에 비해 얇은 한국 찻잎의 문제점을 보완하면서 찻잎 특유의 맑은 맛을 살릴 수 있다.
전통 제다법으로 만든 돈차는 중국의 보이차와 비슷한 맛을 낸다.(사진=C영상미디어) 전통 제다법 수제 덖기로 고유의 맛 살려
차를 수확하는 계절에 하동을 찾으면 하동차문화센터에서 녹차 덖기 체험을 할 수 있다. 가을에 접어든 지금은 차를 수확하는 계절이 아니어서 녹차 덖기 체험 대신 돈차 만들기 체험을 할 수 있다. 돈차 역시 우리나라 전통 제다법이다. 돈차는 동그란 모양에 가운데 구멍이 뚫린 것이 엽전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만드는 방식은 중국의 보이차와 비슷하며, 맛도 보이차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깊은 맛을 내는 것이 특징이다.
돈차를 만드는 방법은 이렇다. 야생 찻잎을 따 채반에 고루 펴고 하룻밤을 재운다. 이 시간을 ‘생잎이 품고 있던 고유한 향을 내놓는 시간’이라 한다. 가마솥에 놓은 삼발이에 찻잎을 담은 채반을 얹고 솥뚜껑을 닫은 후 10~20분 동안 찐다. 이렇게 찐 찻잎을 절구통에 넣고 절굿공이로 찧는다. 쫀득쫀득 차진 느낌이 나도록 절구질을 한 다음 동그란 틀에 넣고 꾹꾹 다져 모양을 잡으면 직경 3cm, 두께 0.5cm 정도 되는 차 덩어리가 된다. 하룻밤 말린 뒤 이튿날 동그란 덩어리 한가운데에 구멍을 뚫고 짚으로 꿰어서 처마 밑에 걸어 말린다. 20일 정도면 완전히 바싹 마른다. 잘 마른 차 덩어리를 최소 6개월 동안 적당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면서 발효시키면 돈차가 완성된다.
하동차문화센터에는 체험학습 전 미리 솥에다 쪄놓은 찻잎이 준비돼 있다. 이날은 전남 광양에 있는 한 고등학교 학생들이 돈차 만들기 체험을 하기 위해 차문화센터를 방문했다. 2층에 있는 덖음 체험실에서 재잘재잘 수다를 떨던 학생들은 김명애 하동차문화센터 실장이 들어서자 이내 조용해졌다. 김 실장이 돈차 만드는 법을 시범 보이자 그들의 눈과 귀가 한곳으로 쏠렸다. 이윽고 절굿공이에 찐 찻잎을 넣고 열심히 찻잎을 찧는 소리가 체험실 안을 가득 메웠다. 동그란 틀에 찻잎을 다져넣는 학생들의 손길이 꼼꼼했다. 이은진(가명) 양은 “평소 차는 티백으로 우려먹는 둥굴레차나 녹차, 우엉차 같은 게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이곳에서 전통 방식으로 차를 만드는 법을 새롭게 알게 돼 좋았다”며 “내가 만든 돈차가 20일 후에 어떤 맛과 향을 낼지 궁금하다”고 소감을 전했다.
돈차를 만든 다음에는 하동 지역 특유의 마실 거리인 ‘잭살차’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초엽 따서 상전 주고, 중엽 따서 부모 주고, 말엽 따서 남편 주고, 늙은 잎은 차약 지어 봉지봉지 담아두고, 우리 아이 배 아플 때 차약 먹여 병 고치고…’ 하동 민가에서 전해오는 민요에 나오는 차약이 바로 잭살차다.
밝은 선홍빛을 띠고 은은한 향이 매력적인 잭살차는 ‘한국의 홍차’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차의 빛깔이 붉다는 것뿐 아니라 차를 만드는 방식 또한 홍차와 비슷하다. 잭살차는 홍차와 마찬가지로 차를 만들 때 발효 과정을 거친다. 한국 전통차는 대부분이 고열에 차를 덖어서 만들기 때문에 발효 과정이 생략되는데, 발효 과정을 거치는 전통차는 잭살차가 유일하다.
김명애 하동차문화센터 실장이 차 마시는 순서를 선보이고 있다.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예를 갖춰서 차를 음미하는 것을 즐겼다.(사진=C영상미디어) 주객 역할 분담 통한 전통 다례문화 체험
잭살차의 제다 방법이 그 외 전통차와 다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옛날에 잭살차는 하동 농민이 왕에게 진상하고 남은 찻잎이나 7~8월에 수확한 억센 잎을 발효해 만들었다. 억센 잎을 차로 마시기 위해 발효 과정을 거치는데 이 과정에서 불소, 비타민 C, 카테킨이 발생한다. 감기 기운이 있거나 배앓이를 할 때 잭살차를 마시면 효과가 있어 예부터 하동 민가에서는 잭살차를 상비약으로 두고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마시곤 했다. 오랜 시간 서민의 약차로 사랑받던 잭살차는 그 전통성과 맛의 우수성을 인정받아 2016년 국제슬로푸드협회가 추진한 ‘맛의 방주(Ark of Taste)’에 등록되기도 했다.
잭살차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다음 3층에 있는 다례 체험실로 이동했다. 희고 깨끗한 다기가 놓인 다상 앞에 선 학생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다기가 배치된 상에 학생들이 둘씩 짝을 지어 앉자 김 실장이 녹차의 종류에 대해 설명했다.
“우전이라고 들어보셨죠? 녹차는 잎이 자란 정도에 따라 우전, 세작, 중작, 대작으로 나눠요. 곡우 전에 가장 먼저 나온 새순으로 만든 최고급차가 우전이고 그 이후 나온 어린 찻잎으로 만든 게 세작이에요. 몸값은 우전이 세작보다 비싸지만 가격 대비 맛과 향은 세작이 좋아요.”
녹차는 일찍 수확할수록 값이 비싸다. 찻잎이 햇빛을 덜 받아야 떫은맛이 덜하기 때문이다. 가장 이른 시기에 수확한 우전이 다른 녹차에 비해 제법 값이 나가는 이유다.
학생들의 찻상에 올봄 하동에서 수확한 수제 덖음차가 놓여 있었다. 다례 체험은 차를 대접하는 주인과 차를 대접받는 손님으로 역할이 나뉘어 진행됐다. 주인이 “차 한잔하시겠습니까?” 하고 운을 띄우면 다례 체험이 시작된다. 손님이 “네, 감사합니다” 하고 대답하면 주인은 다기를 덮은 덮개를 걷어 오른쪽에 가지런히 놓는다. 그다음 찻주전자에 든 뜨거운 물을 따라 식힘사발과 찻잔 등 다기를 따뜻하게 데운다. 커피를 핸드드립할 때 커피잔을 따뜻하게 하는 것과 같은 과정이다. 마실 만큼 물을 식힘사발에 따른 다음 물의 온도가 70℃가 될 때까지 기다린다. 찻주전자에 찻잎을 1인당 2g 정도 넣고 식힘사발에 있는 물을 찻주전자에 부은 후 20초간 기다린다. 녹차가 잘 우러나면 손님 잔과 주인 잔에 세 번 나눠 번갈아 따른다. 찻주전자 위아래에 있는 녹차가 섞이도록 해 차의 색, 맛, 향을 고르게 하는 과정이다. 이렇게 차를 따른 손님 잔을 손님 앞의 상에 올려놓는다.
녹차는 물의 온도가 70℃일 때 가장 잘 우러난다. 잘 우러난 녹차를 손님 잔과 주인 잔에 세 번 나눠 번갈아 따르면 녹차의 맛, 향, 색을 고르게 즐길 수 있다.(사진=C영상미디어) 차를 마실 때는 왼손으로 찻잔을 받히고 오른손으로 찻잔을 감싸 쥔다. 차를 마시기 전 차의 빛깔을 보고 향기를 맡은 후 맛을 보는 것이 좋다. 한 잔을 보통 세 번 정도에 나눠 마시며 소리를 내지 않고 마셔야 한다.
김 실장이 차 예절에 대한 설명을 마치자 다례 체험실에는 다기가 부딪치는 소리 외에는 아무런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뭇 진중한 자세로 다기를 다루는 학생들의 얼굴에는 새로운 체험의 즐거움이 언뜻 비쳤다. 다례 체험이 끝난 후 학생들은 “생각보다 재미있다”, “엄마한테 생일 선물로 다기를 사달라고 해야겠다”는 등 서로 소감을 나눴다. 자칭 커피 애호가인 김인하 양은 “평소 커피를 좋아하는데, 오늘 다례 체험을 하고 나서 차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며 “차는 주로 어른들이 마시는, 접근하기 힘든 음료라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오늘 마셔 보니 생각보다 깔끔하고 입안이 개운해 앞으로 차 마시는 양을 조금씩 늘려보려 한다”고 말했다.
김명애 실장은 “하동 화개면 일대를 방문하면 찻잎을 따고 제다하는 과정뿐 아니라 다례문화도 한 번에 체험할 수 있다”며 “한국 차 시배지인 하동에서 다양한 체험과 함께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길 바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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